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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갑(任在甲)은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와 구국청년계몽회(救國靑年啓蒙會)에 가입하여 연락요원이 되어 서울과 북간도(北間島)를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2년에서 1914년까지 완도군 신지면(薪智面)에서 명신서원(明信書院)을 설립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농촌청년계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방면되었다.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완도군내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에서 선발되어 완도출신 송내호(宋乃浩)의 주선으로 간도 용정(龍井)에 소재한 대성학원(大成學院) 교원으로 교민 2세 교육을 담당하고 군자금 모집차 수회에 걸쳐 국내를 왕래하였으며 김좌진(金佐鎭)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24년 8월 신지학술강습소(薪智學術講習所)를 개설, 김재희(金在禧)·송기호(宋琪浩)·김창선(金昌鮮) 등 50여 명의 학생 및 유한단원(流汗團員) 6명과 함께 강연단(講演團)을 조직하여 신상리(新上里)·월양리(月陽里)·동좌리(東左里) 등 면내 6개 부락을 순회하며 주민들에게 한민족의 우수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강연이 끝난 후 혁명가를 부르다가 같은 해 12월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5년 3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1925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과 1925년 9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8월 28일 완도읍내 중학원(中學院)에서 신간회(新幹會) 중앙본회 상무 송내호(宋乃浩) 입회하에 완도군 신간회지회(新幹會支會)를 설립하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