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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던 그날 우리고장 녹산면에 군인이 절벽에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왜놈 헌병에 쫓기던 한 조선청년이었고 피투성이된 시신은 꺼지기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 2시간뒤 그날 정오에 해방이 되었다. 고향도 성도 이름도 모른다. "큰키에 좀 마른 얼굴 누리끼리한 일본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보재기같은 것 짊어젔더라"고 했다. 해방의 감격과 안타까운 이 비운의 죽음은 그날이후 50년! 지금은 잊혀가는 전설로 묻혀있다. 당시 가덕도의 양포에는 일본육군포대가 있었고 천성과 등대쪽에는 일본해군이 주둔하고 있어 아마 이 병영을 밤중에 탈주해 십리바다를 헤엄쳐 건너 새벽녁에 송길 바닷가 석죽(영전둑)에 닿고 송전->화질마을 바닷가를 따라 녹산->성산에서 한집에 들러 아침요기로 허기는 면했건만 이미 왜놈헌병은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고 그는 다급히 강변(서 낙동강)길을 따라 달아나다 힘은 부치고 총성은 절박하다 할수없어 장락포모랭이(처녀골입구)에서 산으로 기어올라 절벽 낭떠러지에서 총을 쏘는 헌병과 대치하게된다. 이떄가 오전 열시경 진퇴양난이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마침내 "대한독립만세"를 세번 부르고 투신 장렬한 항일(抗日)의 죽음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