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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 형무소 복역의 전말과 동지 오석완·정기환 ∙ 77 한편 박영관의 독립운동 행적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비단 지폐 뿐만 아니라 여러 등기문 서 위조에도 탁월한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전북폭발탄사건의 최종판결문(1930년 3월 12일)에는 박영관의 여러 죄목 중 한 건인 사문서위조죄와 관련된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길게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문서위조건에는 일본인 대서인(代書人)까지 속여 동원하는 등 그 방법이 너무도 치밀하 고 완벽해서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증언에 의하면, 박영관은 전북폭발탄사건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도 본인이 직접 대서소(代書所)의 업무를 처리해줄 정도로 이 분야에 능숙 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데다가 전통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폐 위조에는 남다른 지식과 전문기술이 필요하고, 여기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박영관 이 위조를 전매특허로 담당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지 지 폐 위조에만 간여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된 증언에 의하면, 그는 오석완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호들 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활동도 직접 나서서 수행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박영관은 최종 판결문 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조직 내에서 전천후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1920년대 전남 지역에서 대한통의부의 이름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지폐를 위조한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실제로는 비단 이 두 사람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3) 의창단원 정기환의 정체 이 대목에서 이들 두 사람과 함께 전라남도를 무대로 활약했던 또 한사람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인물은 정기환(鄭基煥, 1896~1985)이다. 정기환은 정균호(鄭均鎬) 혹은 정대성(鄭大星)이란 가명으 로도 활동한 인물로, 장기간에 걸친 뛰어난 활약상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의 인물이 다. 정기환은 고향이 전남 담양군 담양면 천변리로, 현재에도 담양읍 서남쪽 천변리가 행정구역상 그대로 있다. 그 역시 1928년 6월의 전북폭발탄사건 주모자 9인 중 한사람인데, 유독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달 늦은 1928년 8월 25일 담양경찰서에 안치되어 그해 10월 4일에 광주지법 검사국으로 넘겨진다. 1930년 3월 법정에서 그는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죄목은 1927년 9월에 조 인현으로부터 권총 실탄 3발을 무상으로 양도받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기환의 전력은 화려했다. 즉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17일 전남 담양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이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1920년 11월에 만기출 소했다. 이후 그는 북경으로 가서 의창단(義昌團)의 단원이 되어 권총과 무기를 휴대하고 국내로 잠 입했다가 광주에서 1923년 8월 1일에 체포되었다. 다음 기사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