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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비록 이들 사건의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두 기사를 통해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 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조인현의 국내 통의부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여러 차례 지폐(금전) 강탈과 위조를 조직적으로 시도했고, 둘째는 박영관이 적어도 한차례 이상 직접적으로 지폐를 위조했 으며, 셋째는 오석완이 대규모 지폐 강탈을 기도하고 실행에 옮겼다가 실패했고 그 때문에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금전강탈과 위조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두 사람은 각각의 복역 시기와 해당 사건들의 선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오석완의 복역 기간이 8개월이었다면 박영관 또한 그 정도의 실형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 박영관과 오석완의 목포형무소 복역 사실은 1928년 6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및 이를 그대 로 게재한 7월 12일자 신한민보 기사, 1928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렇다면 목포형무소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명칭과 위치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일제강점기 목포형무소는 1909년 광주감옥 목포분감으로 시작해서 1920년 목포감옥으로 승격했 고, 이어서 1923년 목포형무소로 개칭되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쳐 1961년에는 목포교도소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교도소의 위치는 현재 목포시 산정동 일신아파트 자리였는데, 지난 1989 년에 무안군 일로읍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포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수많은 항일 애국지사 들의 울분과 한이 맺힌 곳인데, 현재는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 기도 의왕시로 이전되었지만 이듬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 사관’이란 명칭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원형 보존은커녕 흔적조차 사라 져버린 목포형무소의 사례는 너무도 안타깝다. <옛 목포형무소(목포교도소) : 현 목포시 산정동 일신아파트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