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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그렇다면 정작 박영관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고향땅 고창군에서는 그의 3.1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생가와 친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에는 지난 2018년 10월 전국 각지로부터의 성금에 힘입어 애국지사 박영관을 기리는 공적비가 크게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창에서 발간되는 독립운동 책자들을 보면 그의 3.1운동 사적에 대해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전북폭발탄사건이 너무도 크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여기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렇게 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장성군민들이 고창 출신 박영관의 이름을 장성의 적비에 새겨 넣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듯 박영관의 공로에 무심한 고창군의 처사가 다소 야속하 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19년 3월 15일, 고창 지역의 첫 3.1만세운동은 분명히 무장에서 시작되었고, 그 맨 앞쪽 대열 에는 김영완과 박영관이 있었다. 박영관은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평생 고향을 등져야 했고, 타지에 서 두 번에 걸쳐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출옥 후에도 45년을 은거하며 지내야 했다. 고창의 3.1운동 관련 항일독립운동사에서도 이런 부분은 반드시 엄밀하고 공정하게 평가하여 그 이름과 행적을 불 변의 자랑이자 귀감으로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