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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41 박영관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10년 이상 연상인 두 형이 있었고, 또 60대 중반의 백부 박백규 와 중부 박상규도 있었다. 특히 박백규는 학행(學行)이 있어 지역 유림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에, 박영관도 기본적인 한학(漢學)의 소양을 닦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형들의 도움으로 지역 의 보통학교를 졸업했거나, 최소한 다니다가 중퇴했을 가능성도 있다. 통합 고창군에서는 고창읍의 양명학교(揚明學校)가 1907년에 제일 먼저 설립되었는데, 그 뒤를 이어 무장에서는 1909년 사립 동명보통학교(東明普通學校)와 무창학교(茂昌學校)가 각각 설립인가를 얻어 이듬해인 1910년에 개 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학교는 개교 직후 무창학교가 동명보통학교를 인수하는 형식으로 통 합하여 사립 무장보통학교(茂長普通學校)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1911년 9월에는 일제의 ‘1차 조선 교육령’에 의거, 공립 무장보통학교로 변경하여 개교하였다. 일제의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하면 당시 8세 이상이면 입학 가능했던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에서 4년으로 단축되었고, 12세 이상이 입학하는 고등보통학교도 4년 과정이었다. 지금으로 치 면 전자는 초등학교, 후자는 중학교 정도에 해당되었다. 이것은 수업 연한이 초등 6년, 중등 5년인 일본인 교육에 비해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명백한 차별 정책이었다. 게다가 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의 중학교와는 달리 실업 중심의 교육기관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조선인 고등 보통학교 졸업생은 마 땅히 진학할 고등교육기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이곳 졸업 학력을 인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런 불평등은 3.1운동 이후 1922 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시정되어, 조선인의 수업연한도 일본인 학제와 똑같이 각각 6년, 5년 으로 연장하였다. 이는 학교 제도상의 차별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 무마하려는 의도로 책정한 것이지 만, 실제로 지방에는 상당수의 4년제 보통학교가 그대로 남아 있어 194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사립 무장보통학교가 1911년에 공립 무장보통학교 전환되었다는 것은 조선의 모든 학교들이 바 로 이런 식민지 교육체제로 편입되었는다는 것을 단적인 예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사)송와박영관기념사업회의 2016년 발간 책자에서는 박영관의 3.1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이, 드디어 1919년 3월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선생의 자택에서 중 앙에서 온 선교사 송주일씨와 밀회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태극기 300여개와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온 무장읍내 유지 김영완으로 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 국민휘보, 조선독립가 등을 학교 등사판에 다수 복사하여 은밀히 보관하였 다. 드디어 1919년 3월 15일 오전 11시를 기해 고창군 무장 읍내와 동명보통학교에서 무장읍내 유지와 지식층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박영관 선생은 동명보통학교에서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동명보통학교와 무장학교의 학생과 민간인 약 400명이 참여한 거사였다. 선생은 급히 출동한 왜경에 붙잡혔으나, 왜경의 눈을 때려 그가 실신한 틈을 타 도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