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37 첫째, 박영관이 등사한 독립선언서 외에 국민회보와 조선독립가는 무엇인가? 둘째, 박영관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동명보통학교인가 무장보통학교인가? 셋째, 송주일은 박영관과 어떤 인연이 있어서 무장으로 오게 된 것인가? 첫째, 국민회보와 조선독립가는 무엇인가? 지난 2016년 발간된 (사)송와박영관기념사업회의 책자에 의하면, 박영관이 김영완으로부터 입수 한 독립선언서와 국민휘보, 조선독립가 등의 유인물을 학교 등사판으로 인쇄해서 사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다음 항목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학교는 공립 무장보통학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주 지하다시피 3.1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한 후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 선언서는 천도교 대표 15인, 기독교 대표 16인, 불교 대표 2인 등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받아 1919년 2월 말 21,000장을 인쇄, 전국에 배포된 것이다. 김영완은 은규선의 권유로 3월 3일의 고종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미리 서울에 올라갔다가 3월 1일 파고다공원 시위에 참여했 고, 이때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영완이 가져온 국민휘보(國民彙報)이다. 정확히 이 국민 휘보가 무엇인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국민회보(國民會報)’라는 신문 명칭의 오기(誤記)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3월 21일의 고창읍 만세운동을 주도한 고창 혈맹 3인방 중 한사람인 김승옥은 은규선과 함께 상하이에 다녀와서 고창면사무소의 서기로 위장취 업을 했다. 그는 3.1운동 당시 고창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유인물을 등사했다. 이 유인물은 고창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박동차로 하여금 여행을 가장, 서울에서 입수해오도록 한 것인데, 김영완 이 박영관에게 전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독립선언서⋅국민회보⋅조선독립가’ 등 3종의 유인물이었 다. 그런데 김승옥과 관련된 다수의 책자와 안내서에도 이 국민회보가 ‘국민휘보’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는 특정 인물 혹은 사건과 관련된 사적을 어떠한 고증이나 비판도 없이 그대로 베껴 전하는 잘못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되던 해인 지난 2019년 6월, 경북 영천역사박물관은 매우 귀한 등사본의 지하 신문 1점을 국내 최초로 공개했다. 그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발행된 ‘조선독립신문’ 창간호와 같은 날짜에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회보(발행자 미상)’를 한 면에 같이 실은 등사본이다 . 아래 사진을 보면, 오른쪽 부분은 국민회보를, 왼쪽 부분은 조선독립신문을 각각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