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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31 에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타마자 목사는 1915년에 31세의 나이로 숭일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는데, 이 해는 송흥진이 숭일학교 농감으로 갔던 때이다. 따라서 앞뒤 정황으로 볼 때, 송흥진 의 광주행이 타마자 목사의 권고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타마자 선교사로 추정되는 사진(윗줄 맨 오른쪽)> 광주와 이웃하고 있는 담양에는 지역 최초의 선교사인 타마자의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데, 송흥진이 출소 후 전도사가 되어 담양에서 목회활동을 한 것도 결국 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타마자 목사는 1938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동료 선교사들이 귀국하는 상황에서도 끝까 지 광주에 남아 선교부 재산을 지켰고, 이로 인해 1941년~42년에 약 4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 다가 강제 출국을 당했다. 한국 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그는 미국 애틀란타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4 년 향년 80세로 작고했다. 타마자 목사로부터 기독교 세례를 받은 송흥진은 송주일을 장성으로 파견하였고, 다시 송주일은 박영관의 무장 3.1운동 거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송주일은 송흥진의 광주 숭일학교 출신 제 자로서, 그는 3.1운동 당시 전남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교회에서 경영하던 소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송주일이 광주에서 장성으로 오게 된 것은 장성이 고향인 송흥진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성군은 고창군과 산줄기 하나 너머 이웃한 고을이다. 광주의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장성의 3.1만세운동은 크게 세 곳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송주일이 주도한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시위이다. 송주일은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은사 송흥진으로 부터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그는 3월 10일 광주의 만세시위와 같은 날, 마을의 소룡리교회 교인 약 70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 서신을 읽어주었다. 송흥진의 편지내용은 ‘조 선은 이제 독립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면사무소와 동네 이장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이 서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