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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93 척지점이 동척에 소속된 소작인들 외에는 절대로 소작권을 주지 않거나, 혹은 동척에 고용된 조선인 마름을 이용해 소작농들을 압박하고 횡포를 일삼있던 기사에 자주 나온다. 1926년 5월의 동아일보 에는 1달 사이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동척 토지 이외는 경작을 불허, 만약 위반하면 소작권 박탈 (동척이) 조선의 보고(寶庫)인 전북평야를 홀로 독식하는 것이야 새삼스럽게 세상의 평가를 기다 릴 것도 없으나, 소위 동척 지점이란 것이 중심지 이리에 웅장한 세력을 뻗치고 있는 만큼 가장 참화(慘禍)를 먼저 혹독하게 입는 것도 이리 일대가 더욱 심하다..... 이리동척지점에서는 소위 경 지정리라는 명목 하에 광망한 평야를 정자(井字) 형으로 분획하여..... 소작인을 동척의 전속으로 하여 동척 이외의 토지는 결코 소작하지 못하게 하고, 만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단연히 소작권 을 박탈하는 등 폐해가 많은 바..... 무고한 농민들로 하여금 뿔뿔히 흩어지게 하는 속임수에 불과 한 가증스런 행위에 사람들은 매우 두렵고 놀란 중에 앞날을 심히 우려하는 참상(參狀)이더라. (동아일보, 1926. 5. 9) 돈주고 샀던 소작권은 뺏기고, 마름(舍音)은 어디로 가버리고 없어 김제군 하리면 서정리의 동척 농감(農監 : 마름) 신영록(辛泳祿)이란 자가 까닭없이 금년 소작권 을 변경하여 구 소작인들 사이에 불평이 날로 심해졌다. 이에 이리동척지점에서 향후에 점원이 출장을 나와 60여 호의 소작권을 변경해 정함으로써 ...... 이번에 소작권을 빼앗긴 60여 호 소작 인 중에는 그 소작권을 얼마간의 금전을 주고 취득한 이도 적지 않다는 바, ..... 이제 그 소작권 을 빼앗기게 됨에 그 금액을 찾기 위하여 날마다 마름 신영록 찾으려 했으나 그가 어디로 가버 리고 없으므로 심히 답답하게 지낸다는데, 만일 그 금액을 바로 반환하지 않으면 고소를 제기한 다더라. (동아일보, 1926. 5. 24) 위의 첫 번째 기사를 보면, 우선 이리동척지점은 만경강 유역 이리의 경지정리 과정에서 기존 소 작인들이 가지고 있던 소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동척 전속의 소작인에게만 권리를 인정했다. 이로써 조선의 농민들은 동척의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더 심해지면 고향을 등지고 타향 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두 번째 기사는, 일제의 농민수탈 총본산인 동척에 기생 하면서 같은 동족인 농민을 착취하는 조선인 마름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익산 지역은 전북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농사 짓는 환경이 나아졌고, 이에 따라 쌀의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일본인 농장주와 몇 안 되는 조선인 지주들의 경제적 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