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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수리조합 제방을 익산 농민이 파괴... 경찰에서 무장 출동 전북지방은 가물이 심해 민심이 흉흉해졌는데, 익산군 동산리 익옥수리조합 부근에 사는 농민 수 백명은 흉년들어 굶어죽으나 미리 감옥에 가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란 비참한 부르짖음으로 곳곳 에 모여, 수백만 두락의 못자리가 다 말라붙되 오직 넘치게 흐르는 수리조합 물을 볼 때는 눈이 뒤집히는 듯했다. 이에 운명을 최후로 호소하는 뜻으로 지난 3일 새벽에 수리조합 제방을 파괴하 여 물을 끌어들이려 하자 수문지기와 두 번의 격투가 있었다. 급보를 들은 경찰서원도 크게 출동 하여 민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를 잡아 취조하는 등 한참 살풍경을 이루었는 바, 사정이 사정이 므로 경찰편에서도 동정을 표하여 잡은 자를 석방하며 수리조합에 교섭하여 특히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런데 지난 6일 새벽에 또다시 그 상류인 팔봉면 석암리와 분일면 금강리 두 곳에서 각각 수백 명의 농민들이 또한 모여서 수리조합 제방을 서너 곳씩 끊고 물을 끌어내렸다. 이에 순시하던 조 합감시원과 경찰서 형사들이 현장에 가서 해산케 하였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도로 험악하여 조합감시원의 폭악이 심할수록 민중은 극도로 흥분되어 죽여라 밟어라 하여 형사의 생명까지 위 급하다는 형세였다. 이에 이리경찰서는 대경실색하여 비상소집으로 다수 경관이 무장하고 현장에 출동하여 군중을 포위, 체포해서 방금 경찰서로 데려가 취조에 비지땀을 흘리는 중이요.... 농민들 은 가장 온순할 뿐만 아니라 문제가 오직 사활문제 그것이므로 경찰 당국도 되도록 관대한 처치 를 취하겠다더라 (동아일보, 1924. 7. 8) 위 기사는 이리 지역 농민들이 수리조합의 횡포에 대항해 제방을 무너뜨리고 물을 강제로 끌어들 이려는 모습과, 이를 저지하려는 수리조합원 및 경찰에 대항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너무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신문 기사 말미는 일제 경찰이 우리 농민들을 관대하게 처벌하겠다는 뜻을 비 추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심이 동요하지 않게 하려는 언론플레이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밖에도 1920년대 이리에서는 소작쟁의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1929년 전국에서 발생한 소작쟁 의 389건 중 전북에서 일어난 것이 314건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전국 소작쟁의 의 80%에 해당되는 수치이다. 지주만 보더라도, 1930년 익옥수리조합 내에서 10정보 이상을 소유 한 조선인은 12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 지주는 44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⑥ 소작농 수탈의 정점, 동양척식주식회사 한편 전북지역 중에서도 특히 수리조합의 관개사업과 경지정리로 대규모 농장이 들어선 익산과 김제평야 농민 수탈의 정점에는 이리동척지점이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신문을 보면, 이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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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북폭발탄사건의 발각과 체포 및 재판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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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북폭발탄사건의 발각과 체포 및 재판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