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page

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91 식부, 비료사용, 제초, 예취, 탈곡 등 생산과정, 수확물의 품질, 처분 등의 유통 분배에 이르는 모든 사항을 규정해놓았다. 소작료는 대개 수확량의 50~80%를 지불하고, 내지 못할 때는 연 20%의 연 체율을 지불해야 하는 악몽이었다. 이는 얼핏 보면 식민시대 이전의 전통적 지주와 소작인 관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여 대규모 농장 을 경영할 수 있었던 배후에 바로 동척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익산 내 농장 분포도(1932)> 하지만 조선인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인 중소지주는 수리조합의 과도한 부담으로 오히려 땅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에 따른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 다. 또한 소작료에 분개한 익산 지역 소작인들은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조합원이 아닌 농민 들은 가뭄에 논바닥이 말라가도 물을 댈 수 없어 조합의 제방을 파괴하기도 했다. 다음의 동아일보 기사는 바로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극히 일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