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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구불구불한 강을 바로잡은 직강(直江)공사 후의 만경강변 지도> 그렇다면 익옥수리조합이 운영하는 물길관리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계층은 누구였을까? 이는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 대지주들이었다. 특히 대장촌(大場村, 현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의 호소카 와(細川護立)와 익산⋅군산 등지에 농장을 둔 후지이 간타로로 대표되는 일본인 지주였다. 호소카와 의 대규모 농장이 있는 대장촌은 대단위 정미소를 갖추었고 헌병분견소와 우편국은 물론 소학교도 갖추어, ‘이상농촌’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한다. 대장촌은 한 명의 일본인이 2,100여 명의 조선인 소작인을 지배하는, 좋게 말하면 배후 신도시 같았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왕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 ⑤ 일제의 농민 수탈과 이리 지역 농민들의 저항 앞서 살펴보았듯이, 익산지역은 1920년대 대규모 간선수로와 만경강 직강공사를 통해 농업 선진 지역으로 발돋움했다. 구체적으로 전라북도의 미곡 생산량은 1910~14년 당시 연평균 1,126,000석 이었던 것이 1930~40년은 연평균 2,047,000석으로 82%나 증가하였다. 그런데 쌀 생산량이 이처 럼 두 배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농민들은 굶주렸다. 일본으로 실어 나른 쌀이 오히려 4배 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춘포리의 대장촌과 오산평야를 필두로 전북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항 을 통해 1916년 234,000석이 반출되었는데, 1926년에는 980,000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처 럼 한 해 전북의 쌀 생산량 절반 이상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니, 익산 농민들의 삶은 그저 궁핍하기만 했다. 춘궁기에 쌀이 떨어지면 농민들은 비싼 이율의 장리쌀을 들여야 했고, 심하면 고향을 등지고 중국이나 연해주로 이민을 가야 했다. 대단위 농장의 직원 일본 교토나 규슈의 농대출신이 최상층의 지배인으로 있었고, 조선인 직원은 이리농림, 정읍농고 출신이 많았다. 직원-마름-소작인이라는 구조 속 일본인 지주는 매년 2월에 소 작인과 5인 연대보증인이 날인하는 소작계약을 맺었다. 소작증서의 내용은 품종의 지정, 경운, 파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