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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89 속되었다. 바다 같은 넓이를 자랑하는 옥구저수지에 가두어진 물은 현재 미군비행장에서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완주군 고산면의 대아댐에서 옥구저수지까지의 인공 도수로인 대간선수로> 이상과 같은 수리사업과 벼품종 개선으로 인해 만경강 유역의 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 그러나 수리조합의 대간선수로 사업을 통한 물길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1924년의 대가뭄에 이 어 1925년 대홍수는 농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만경강은 바닷물의 영향으로 하천 하류에서 수위가 변하는, 이른바 감조하천(感潮河川)이어서 바닷물이 올라와 애써 지은 농작물이 염해에 시달 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수해가 발생하면 배수가 문제되었고, 연평균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는 것도 벼농사의 큰 장애였다. 이에 일제는 또 한 번의 대규모 공사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불구 불한 만경강을 곧바로 펴는 만경강 직강(直江) 공사였다. 만경강은 전북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전주~익산~김제~옥구를 지나는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 ) 으로, 전체 물길의 길이는 거의 100km에 이르렀다. 이 굽은 물길을 펴는 공사가 시작되자 이리에는 많은 공사판 노동자들이 밀려들어왔다. 1926년 익산과 김제를 잇는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인 만경교 는 550m나 되는 강폭을 하나로 이었다. 마침내 1938년 만경강 직강공사가 완공되면서 길이 76km 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여 강의 실제 길이를 20km 이상 줄여놓았고, 이후 현재까지 이 물길은 한 번도 홍수로 넘치지 않았다고 한다. 대간선수로와 만경강 직강공사로 관개용수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자 수리조합에서는 대대적인 경지 정리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익산군 오산면은 우리나라 최초로 경지작업이 시행된 곳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수세는 높아졌고, 많은 비료대를 부담해야 했다. 또 소작료 는 전통적으로 30% 수준이었으나 수리조합이 결성되면서부터 50%까지 인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