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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87 <익산 시내 이리동척지점(좌)과 현재 이 위치에 들어선 IBK기업은행(우)> ④ 1920년대 수리조합의 건설과 대규모 수리사업의 전개 이리지역에 일종의 농업회사인 대농장이 들어서고 철도공사가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일제는 농장 주들과 결탁하여 수리조합 창설을 서두른다. 만경강에 인접한 지역은 안정적인 수로가 없었기 때문 에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로 대표되는 식민통치자와 지주들은 농사용 물길을 찾기 시작했다. 1905년~1919년에 이르는 수리조합 조성기 동안 익산을 둘러싼 도내에서는 모두 6개의 수리조합이 탄생했다. 대간수로 건설을 통해 ‘조선의 수로왕’으로 불렸던 후지이 간타로가 익산에 와서 처음 주목한 곳 은 황등호였다. 조선 초 폐지된 이 저수지를 살리기 위해 1909년 2월에 임익수리조합이 설립된다. 그러나 오늘날 원광대학교 뒤쪽에 대규모로 조성된 이 저수지는 당초 계획했던 것만큼 안정적인 수 원이 되지 못하였다. 보다 선진적인 수리농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안정적인 물길이 필요했고, 이에 일제는 1920년대부터 대아댐과 대간선수로의 건설에 집중한다. 이와 동시에 군산과 옥구, 김 제와 부안 등지에서는 끊임없이 간척사업이 계속되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3.1운동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잠시 일본의 쌀파동을 언급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점에서 일본 내 쌀파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에서 미곡증산정책을 펼쳐 부 족한 쌀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제는 미곡증산의 최대 장애를 관개용수의 불안정성으로 보고 적 극적으로 수리조합 설립을 지원했고, 때마침 호황을 맞은 일본에서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었다. 농장 주들은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수리시설을 갖추기 위해 만경강 중류의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 수리조합을 통합하여 1920년 익옥수리조합을 새로 설립했다. 이로써 대간선수로 사업은 박차를 가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