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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85 기반의 확보를 통해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 는 소위 일본의 ‘자작형 농업 이민자’ 24만 명을 10년에 걸쳐 한국에 진출시키려는 데 있었다. ‘척식 (拓殖)’이란 말 자체가 ‘한 국가에서 국외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정책적으로 촉진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미 단어 자체에 식민지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한다는 뜻이 담 겨져 있다. 동척의 설립과 사업 추진의 최대 변수는 이민 사업에 필요한 24만 정보(1정보는 3천평) 규모의 광대한 토지 확보였다. 일본이 양국에서의 법률 제정과 한국 측의 토지 출자 및 토지 매수 편의 제 공, 임원 임명 등 한일 양국의 ‘협동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원활한 토지의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자본금 1천만 원의 3할을 차지한 한국 정부의 출자는 모두 토지로 이루어 졌다. 따라서 동척 설립에 대해서는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면 대체로 반대 의견이 많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일제는 1910년부터 식민지 조선에서 총독부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국유지 불하 방법으로 꾸준히 토지를 매입하여 1917년 말에는 약 7만 5천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조선에서 최대 지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 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서서 농민들 이 저항과 원성을 샀다. 소작민들에 대한 수탈은 결국 한국인들의 대규모 해외 이주를 불렀다. 1926 년까지 무려 30만 명의 한국인이 농토와 경작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갔으며, 그동안 일본 농민들 은 1만호 가까이 늘어났다. 한편 1908년 창립 당시 서울에 본사를 두었던 동척은 1917년 7월 동척법이 개정되면서 그 본사 를 1921년에 동경으로 이전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은 경성지점이 됨과 동시에 동척의 영업 목적도 ‘조선 및 외국에 있어서의 척식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동척은 지주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