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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에는 3,063가구 13,776명의 인구가 거주했는데 이중 일본인이 920가구 4,097이나 되었다고 하니 , 이는 익산면 인구 중 일본인의 비중이 30%나 되는 것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권 분리구역> 한편 철도 건설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한 식민적 이중구조를 만들어냈다. 본래 이리(裏里)의 어원이 되는 솜리는 지금은 폐역이 된 옛 전라선의 출발지점인 동익산역 인근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일제 강점기 명칭은 구이리역(舊裏里驛, 후에 동이리역)이었다. 그런데 구이리역 주변부는 차츰 호남선 이 리역이 들어선 동측 신시가지에 비해 저조한 발달 상태를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중심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리역 신시가지에는 여관과 요식업을 비롯하여 익산군청과 이리읍사무소, 동양척 식주식회사 이리지점, 삼남은행 등의 업무시설이 집중되면서 발달했고, 따라서 이곳은 독점적인 일 본인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반면 조선인의 거주공간과 상업활동은 구이리역 부근에 집중되면서 조선 인의 생활권과 일본인의 생활권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이중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1920년대를 계기로 이리역 동측지역에 도로가 확충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③ 일제의 식민지 경영과 이리동척지점의 설립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는 1908년에 한일 양국의 ‘협동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설립되었다. 이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일본 정부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그들의 특권에 기초한 독점적 특수 회사이다. 동척의 설립 목적은 안정적인 식민지 지배 체제의 구축과 치안 유지를 위한 광범한 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