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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영관 출생기의 전북 무장 지역 및 시대적 배경 ∙ 3 2 박영관 출생기의 전북 무장 지역 및 시대적 배경 송와 박영관(松窩 朴永寬, 1899~1975)은 1899년 전북 고창군의 무장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무장(茂長)은 본래 고창(高敞)과 이웃한 고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전국 행정구역이 대대적 으로 통폐합될 때 흥덕(興德)⋅고창(高敞)과 더불어 고창군으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박영관이 태어나 서 15세까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당시에는 엄연히 무장 고을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시절이므로, 이후에도 그는 ‘무장’에 대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무장현은 인근 고 창에 비해 호구와 인구수가 무려 3배 이상이나 많았다. 또한 물산도 그만큼 풍부해서 부임하는 현감 의 출신이나 지위가 인근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향교만 하더라도 무장향교(1420년)가 고창향 교(1512년)나 흥덕향교(1621)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던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영관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무렵,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전라도 무장현 지역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자리매김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무장 지역 인물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창군 무장면 공음리의 동학기포지 기념조형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된 계기는 주지하다시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어디까지나 우발적 민란 수준의 봉기였고, 조직적 군사 행동으로 전투를 치르기 위해 농민혁명 지도부가 포고문을 띄우고 전쟁을 선포한 곳은 바로 무장현이었다. 동학농민 혁명사에서 이른바 ‘무장기포(茂長起包)’라고 하는 것은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구체적인 장 소는 현재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번지이다. 과거에는 이곳을 아홉 줄기의 물이 흐른다 하여 ‘구 수내’라 하였고,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 이곳 일원은 전라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