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page

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83 과 이리를 연결하는 호남선 철도 중간역으로 함열역과 황등역이 건설되면서 조선시대 행정 거점이 었던 함라의 기능이 쇠퇴하고 신시가지로 대체되고 황등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또한 이리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전라선의 중간역으로 대장촌역이 건설되면서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시가화 되자 이곳이 익산지방의 새로운 중심구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익산 지방은 차츰 조선시대 군현의 치소가 있던 금마⋅여산⋅용안⋅함라 등의 전통 구시가지와, 이리역 주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철도역과 함께 출연한 함열⋅대장촌 등의 근대 신시가지가 공존하는 형 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 호남선 노선의 변경과 이리 신시가지의 발전> 호남선 건설로 이리역이 들어서면서 일본인 거주자가 이곳 신시가지로 급속히 유입되는 현상은 서울 영등포나 대전, 김천 등 철도가 들어서는 지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이리 지역에는 1906 년에 처음 일본인이 거주했는데, 호남선과 군산선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이 시작된 1910년 말에 5가구 16인으로 늘더니, 철도공사가 시작된 1911년에 66가구 224인, 호남선이 일부 개통된 1912 년에는 270가구 946인으로 증가했다. 이어서 대전~목포의 호남선 본선 261.5km의 철도가 모두 완공된 1914년에는 일본인 이주자가 437가구 1,506명으로 전년 대비 무려 50% 이상이 증가하였 다. 이리폭발탄사건이 계획되고 있었던 1927년 6월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이리가 속해있던 익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