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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전주부에 속해 있던 남일면 지역은 조선 말기인 1899년과 1906년에 걸쳐 월경지와 이른바 ‘땅거 스러미’라 하는 두입지(斗入地) 정리 칙령에 의해 익산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1912년 3월 6일,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이곳에는 이리역이 개설되었다. 이로써 전통시대 익산과 함열, 전주에서 모두 한갓지게 떨어져 있던 이 변두리 지역이 비로소 이리역의 등장과 함께 화려한 이리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흔히 상전벽해란 바로 이런 곳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앞서 고창지역의 고창⋅무장⋅흥덕이 1914년 부군면 통합으로 고창군이 되었듯이, 익산 지역 또 한 1914년에 북부의 4개 고을과 남부의 옥야현 지역까지 흡수하여 거대한 익산군이 되었다. 이때 옥야현 소속 5개 면 중 이리 마을이 속한 남일면과 동일면은 익산면으로, 남이면과 서이면은 오산면 으로,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이로써 익산의 본래 중심지였던 동부 금마면은 그 힘을 잃고 변두리였던 익산면, 즉 그 중심인 이리가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는 다음 항목의 지도에 도 나오듯이, 호남선 철도 노선이 과거 여산~익산을 축으로 하는 동부 라인에서 함열~이리 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때 이리 지역에서는 일본인 거주자의 인구 밀집도가 전북 지역에서 군산 다음으로 높았다. 한편 이리가 속해있던 신생 익산면은 1931년에 익산읍으로 승격했다가, 바로 그 해에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 이리읍은 다시 이리부를 거쳐 이리시로 승격했고, 나머지 영역의 익산군과 공존해오다가 마침내 1995년에 익산시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익산 시내는 지난 1백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리’라는 이름을 띠고 식민 시대에 배태된 온갖 비약과 굴곡의 모순을 지닌 채 성장해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② 근대 신도시 이리와 식민적 이중구조의 탄생 1900년 이후 이리를 중심으로 신작로가 개설되고 철도가 건설되면서 익산지방에는 철도교통의 거점을 중심으로 소위 근대 신시가지라 불리는 새로운 시가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에서 이리역 일대가 이렇듯 본격적으로 발전동력을 확보한 것은 1911년의 일이다. 즉 호남선 (이리~강경)과 군산선(이리~군산) 철도부설이 이루어지기 전 일본은 금마면 소재지(당시 군내면)를 거점으로 익산지방 통치를 구상했기에 그에 따라 익산군청과 우편소, 헌병분대 등의 근대적 공공기 관은 당연히 옛 익산의 중심지인 금마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1908년 전군가도(현재 27번 국도)를 시작으로 신작로가 건설되고 호남선 철도노선이 만경강의 목천포를 경유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판도 가 변하기 시작했다. 즉 호남선 부설공사가 시작된 1911년 8월에 익산군청이 남일면으로 이전하고 뒤이어 우편소와 헌병분대가 금마에서 옮겨오면서 이리가 익산지방의 중심지로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리의 위상은 1912년 호남선, 1914년 전라선(전북경편철도, 이리~전주) 개통을 계기로 더 욱 가속되었다. 1912년 3월, 이리역 건설로 형성된 이리 신시가지 외곽지역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