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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81 점 또는 왕도(王都)였으며, 삼국시대 백제 무왕 때에는 다시 한 번 역사의 주무대로 부각된 곳이다 . 익산이 공주⋅부여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 역사지구로 등재된 것은 이처럼 익산의 옛 중심지 금마 면에 남아 있는 미륵산, 용화산 등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과 삼국시대 불교 유적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익산 지방은 신라의 삼국 병합 이후 한적한 지방도시로 전락했고, 고려시대에도 그다 지 중시되지 않은 채 전주목에 속한 지역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과거의 ‘익산’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익 산시의 일부 작은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1914년 이후 현재의 형태를 갖춘 익산시는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까지 모두 5개 지역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즉 오늘날 익산시의 북부지역은 금마면 중심의 익산(益山)⋅여산면 중심의 여산(礪山)⋅용안면 중심의 용안(龍安)⋅함라면 중심의 함 열(咸悅)등 4개의 고을이었다. 또한 남부지역 익산 시내의 85m짜리 낮은 산인 배산(杯山) 남측을 거점으로 한 지역, 즉 현재 익산역 바로 북쪽 고현초등학교 지점은 신라 때 옥야현(沃野縣)의 중심지 였다. <조선 후기 익산시 지역 고을의 중심 영역> 옥야현은 고려 초에 전주의 속현으로 있다가 폐지되어 조선시대 내내 전주부의 월경지(越境地)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옥야현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은 조선후기 정조 때인 1789년에 발행된 호 구총수(戶口總數)에 비로소 ‘남일면(南一面) 이리(裏里)’라는 구체적 지명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이 리는 말 그대로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솜리’라 불리던 것이 차츰 한자 지명으로 정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