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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전북폭발탄사건은 1920년대 여러 언론에서 전북폭탄사건⋅이리동척사건⋅이리동척습격계획⋅ 전북통의부사건⋅전북폭인사건(全北暴引事件)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일제 식민지시대 최대의 국내 항일무장투쟁 기도사건이다. 이 사건의 명칭은 다양하지만 대략 그 폭파 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는 ‘통의부’를 넣고 대상을 기준으로 할 때는 ‘동척’을 넣으며, 조직원들 의 법정위반 항목에 초점을 맞출 때는 ‘폭발탄’ 내지 ‘폭탄’이라는 말을 넣는다. 이상의 여러 사건 명칭 중 이 책에서 일관되게 ‘전북폭발탄사건’으로 통일한 까닭은 첫째 ‘통의부’ 의 경우 남만주 본부와 국내 하부조직의 연계성을 실체적으로 규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동척’의 경우 동척이 실제로는 습격되지 못하면서 그 계획의 전모를 알 수 없을뿐더러 그런 이유로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문에도 일체 ‘동척’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적 객관성을 유 지하기 위해 ‘전북폭발탄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관련자들의 생전 증언과 전후 언론보도를 통해 그 폭발 대상이 ‘이리동척지점’이었다는 사실은 엄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박영관과 그 동지들은 대한통의부 단원 조인현으로부터 권고를 받고 통의부의 일원이 되어 수년 동안 군자금 모집을 위해 무력수단까지 불사해왔다. 마침내 이들은 1928년, 식민지 조선의 수탈 창 구 중 하나였던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이하 ‘이리동척’)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인현을 비롯한 조직원들이 일제히 검거되면서 이 야심찬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리동척 폭파 기도사건, 즉 전북폭발탄사건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연 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식민지시대 국내 최고의 조직적 폭발기도사건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렇 다면 이들은 왜 하필 이리 동척을 그 목표로 삼았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리를 비롯 한 익산, 김제 등의 전북지역이 일제 식민지 경영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수탈당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둘째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이리동척 습격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서 1926년 12월 나석주 열사의 경성 동척 지점 폭파 시도와 그 여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익산 지 역과 이 리 동척 지 점 설 립의 시 대 적 배 경 ① 전통시대 익산과 이리 지역의 연혁 2021년 현재 우리에게 있어 ‘익산’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미륵사지와 왕궁리 오층석탑으로 대변되는 세계문화유산의 도농복합도시 이미지이다. 익산 지방은 실로 고대 마한백제시대의 지방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