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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 형무소 복역의 전말과 동지 오석완·정기환 ∙ 79 었다는 것이다. 이 조직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지만, 어쨌든 대전현충원 공훈록에 의하면 정균호, 즉 정기환은 박용만(朴容萬, 1881~1928) 등과 함께 국내의 각 경찰서와 도청의 파괴, 그리고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의창단을 조직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재판기록에 의하면 박용만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대신 의창단의 단장으로 이팔룡(李八龍)이라는 인물이 등 장한다. 정기환은 그로부터 무기와 권총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다. <대구복심법원의 정기환 항소심 판결문(1924. 5. 31)> 이팔룡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가 없어 알 수 없는데, 아마도 박용만이 이 가명을 썼는지도 모르겠 다. 하지만 박용만은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맹활약하던 거물급 독립운동가였고, 1921년 당시 북경 에서 조선공화정부 건설에 앞장서며 임시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다. 따라서 정기환이 임시정 부와 연결되었다면 박용만 혹은 이팔룡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정기환의 재판 기록에 분명하게 나오듯이, 그는 위 조선일보 기사에 나오는 ‘의열단원’이 결코 아니고 ‘의창단원’이 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로서, 아이러니하게도 박용만은 1928년 의열단원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창단의 정기환과 통의부의 박영관⋅오석완은 비록 그 소속 조직이 서로 달랐다 할지라도, 전라도 지역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강탈하고 문서를 위조했으며 필요에 따라 총기로 상대방을 위협했던 모습까지 거의 유사한 목표와 행동양식을 공유했다. 게다가 그 또한 박영관⋅오석완과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죄목으로 3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이렇게 볼 때, 정기환은 박영관과 오석완의 목포 시절 활동 및 목포형무소 복역, 그리고 훗날 전북폭발탄사건과 관련해서 당시의 전반적인 흐름과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범주의 인물이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