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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전남 광주경찰서에서는 지난 초하루날 폭탄과 권총을 가진 의열단(義烈團)원을 체포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본 사건에 대하여 경찰 당국에서는 극비밀에 부쳤으므로.... 이제 그 대개를 소개하건대, 원적을 담양 읍내에 두고 현재 중국 북경 조양대학 (朝陽大學) 사회과에 재 학중인 정대성(鄭大星) 일명 정기환(鄭基煥)은 전라남북도에 군자금모집 담임의 책임을 띠고 상 해임시정부로부터 여비 100원을 타가지고 지난달 28일에 광주에 도착하여 숙소를 그전부터 알 던 광주읍내 누문리 문평식(文平植)의 집에 정하였다. 이어서 비밀리에 활동을 개시하여 군자금 을 모집코자 광주 유력가인 최선진(崔善鎭)을 방문하려고 했다. 이에 그의 죽마고우인 신현갑(申 鉉甲)의 소개로 최씨를 면회한 후 군자금 10만 원을 내라고 하였으나, 최씨는 현금이 그와 같이 없으나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정대성 일행은 그러면 곧 주선해서 하인을 보낼 터이니 보내 달라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편지를 보내었으나 최씨가 보지 않았다. 정대성 일행은 이뿐 아니라 광주의 각 재산가를 찾아가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머무르던 중, 경찰의 탐문으로 체포되어 방금 엄중히 취조를 받는 중이라는데 ..... 사건은 극히 비밀에 부친다더라. (조선일보, 1924. 8. 10) 정기환은 이 사건으로 1924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의 중형이 확정되는데, 이는 그나 마 2월 광주지법에서 5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결과였다. 당시 그의 죄목은 문서 및 유가증권 위조와 총포화약류 소지, 그리고 강도미수 등이었다. 이에 그는 1927년 2월 19일에 만기 출소했다가, 다시 그해 9월에 조인현과 접촉하여 실탄을 받은 것이다. 위 사건의 판결문에서는 물론 전북폭발탄사건 관련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그가 북경에서 온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가 하는 것이다. 위 기사만 보면 자칫 그가 상해에서 광주로 도착한 때가 자칫 1923년 7월 28일 즈음인 것처럼 보인 다. 하지만 정기환의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에는 그가 1922년 6월에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한 것으 로 나온다. 또한 당시 재판기록에는 그가 1923년 1월 경성에서 문서위조를 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는 박영관과 조인현이 목포에서 만난 1923년 3월부터 7월까지 는 전남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송주일, 송흥진과 연결된 광주의 타마자 목사는 담양지역이 주 선교 지역이었고, 박영관 또 한 송주일과의 인연으로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박영관이 담양, 장성과 연결되어 ‘정기환–송주일-송흥진-박영관-오석완-조인현’의 인적 벨트가 형성되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조인현의 통의부가 1923년에서 1928년까지 약 5년간 전라도, 특히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의 보이지 않는 끈 끈한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정기환과 관련되어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상해에서 결성된 의창단(義昌團)의 조직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