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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 형무소 복역의 전말과 동지 오석완·정기환 ∙ 75 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국내 언론 기사가 미국으로 전달되는 데 1달 가량이 걸렸던 것이다. 어쨌 든 같은 내용의 이 두 기사에는 박영관만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다음의 6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반대로 오석완의 목포형무소 복역 사실만 등장한다. 그리하여 (1927년 경부터) 만단 계획을 착착 진행하는 한편, 자금조달 목적으로 기계를 설치하 고 지폐를 제조하며, 폭탄을 제조하기 위하여 기술사(技術師)까지 초빙하여 거사하려 할 즈음에, 동지 중 학식과 범절이 발군할 뿐 아니라 계획에 총참모격인 전남 장진(長津) 오석완(吳碩完)이 전남 강(姜)모라는 부호에게 군자금 충용으로 지폐를 제조할 터이니, 그 밑천 몇천원만 제공하라 고 하였던 것이 결국 발각되어 일체 착수도 못하고 목포(木浦)형무소에서 8개월의 징역을 하게 되었으므로, 전기 조인현은 크게 낭패하여 만사를 중지하고 그가 오월 그믐께 나오기만을 기대하 여 모든 계획을 진행하기로 하고, 거짓 술책을 다하여 경찰의 시선을 피하려고 군산을 떠나 전주 (全州)로 옮겨가서 이발직공(理髮職工)을 가장하며 오직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8. 6. 15) 우선 이 기사에서 보면, 오석완은 사건의 주역들 중 학식과 태도가 발군이고 계획을 세움에 있어 총참모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 미처 다 싣지는 못했지만, 본래 이 기사 의 앞머리에는 당시 체포된 14인의 성명과 주소, 나이가 나온다. 그런데 관련자들의 나이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또한 오석완이 장성 출신임에도 장진(長津)이라고 쓴 것을 보면, 사건 초기 언론에서는 아직 통의부 단원들에 대한 신상 정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훗날 최종판결문을 보면 오석완의 죄목 나열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간략하게 나와 있어, 과 연 그가 조직의 규모에 걸맞는 총참모 역할을 수행했는지도 다소 의문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박영관과 오석완의 목포형무소 복역 사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즉 앞선 기사에서 박영관은 지폐를 위조한 죄목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오석완은 지폐 위조의 샘플이 되는 상당량의 지폐를 전남에 사는 강(姜)모라는 부호로부터 취득하려 했다. 말이 종용이지, 이는 사실 강탈이나 다름없었 을 것이고,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석완의 지폐 강탈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실제로 지폐 위조까지 실행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폐 위조 기술을 가진 장본인인 박영관이 이 강(姜)모 부호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박영관이 복역을 하게 된 지폐위조사건이 이 강(姜)모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인지, 아니면 이보다 앞선 사건으로 목포형무소 복역을 하고 나왔는데 이때 또 오석완과 함 께 지폐위조를 도왔는지, 그도 아니면 박영관은 이 강모 사건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것인지 도 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언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