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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없고, 당시 신문에만 한두 줄 짤막하게 언급된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기록과 정황을 통해 추론해보면, 오석완과 박영관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시기는 1927년 5월 이후로 보인다. 오석 완은 이 일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인 1928년 5월 경에 출소한 것으로 보이고, 박영관은 이보다 조금 더 빨리 출소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추적해보자.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체포된 지 사흘 후인 1928년 6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의 한글 어법과 문투는 지금과 달라서 조금 난해하므로, 이를 적절히 풀어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북 이리를 중심으로 김제와 전주 일대를 비롯해 전남 광주까지 확대되어 다수의 피의자를 검 거하게 된 비밀단체 사건은...... 본지가 탐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작년 봄부터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다액의 군자금과 무기 탄약 등의 공급을 받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리동양척식 회사 지점을 습격하여 경찰의 주력이 그곳으로 몰린 틈을 타서 각 부호의 집을 엄습한 후 많은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들 중에 박모(朴某)는 일찍이 군자금을 보충하고자 지폐 위조를 하다가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했던 사람으로, 그 범위와 계획이 자못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 한다. 결국 지난 6월 6일에는 다시 이리경찰서원이 전남 모 방면으로 출동하여 권총 한 자루 와 실탄 수십 발을 압수하는 동시에 두 사람의 혐의자까지 체포해 왔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8. 6. 9) 이 기사를 종합해보면, 일제 경찰들은 여러 탐문을 통해 특정 비밀단체가 전북폭발탄사건을 일으 키고 그 틈을 이용해 부호들의 집을 공격해 군자금을 조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데 이 단체의 군자금 충당 방법은 단지 금전 강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도 아예 금전, 즉 지폐 위조까지 시도한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지폐위조사건은 ‘그 범위와 계획이 자못 컸던’ 것인데, 주역은 바로 ‘박모(朴某)’라는 사람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들 관련 자 중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박영관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박영관이 군자금 모집과 지폐위조를 한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는 점이다. 아쉽지만, 이는 곧 박영관의 목포형무소 수감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어쨌든 동아일보 6월 5일 기사에는 경찰들이 6월 3일 밤에 장성으로 출동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 6월 9일자 기사를 보면 박영관과 오석완은 이로부터 사흘이 지난 6월 6일자에서야 체포된 것으 로 보인다. 당시 미주 한인단체들이 미국에서 결성한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7월 12 일자에도 이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는 당연히 위 동아일보 6월 9일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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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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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산 지역과 이리동척지점 설립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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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산 지역과 이리동척지점 설립의 시대적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