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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를 첫머리에서 다룬다. 무장면은 조선 초기부터 1914년 고창군에 통합되기 이전까지 무장군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다. 이 고장은 동학혁명 때 농민군이 비로소 무장을 갖추고 선전포고를 한 뜻깊은 지역이다. 또한 대한제국기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이 가열차게 일어나 무력투쟁을 전개했던 곳이었다. 박영관 선생은 나고 자라면서 이와 같은 무장 기질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고, 이런 기질 은 곧 무장 3.1만세운동과 전북폭발탄사건을 주도하는 저력이 되었다. 무장면 만세시위는 고창 지역 최초의 3.1운동으로서, 선생은 당시 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 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고창 , 정읍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장성, 영암을 거쳐 목포로 피신한다. 그런데 그동안 선생의 3.1운동 사적 은 전북폭발탄사건에 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규명된 적이 없었다. 이에 고창지역 전반의 항일운동 상황과 무장면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규명이 필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고증과 추론을 통해 해명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선생의 제2의 고향인 장성 지역의 3.1운동도 소개해본다. 박영관 선생은 1923년 3월, 목포에서 대한통의부 단원 조인현을 만난다. 조인현과의 만남은 이후 위조지폐사건과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전개된다는 측면에서 선생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된다. 이에 남만주 항일독립운동의 연합체인 대한통의부의 연혁과 변화 과정을 우선 상세히 알아보고, 이어서 조인현이 통의부 단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동지들을 설득하고 포섭하는 과정도 살펴볼 것이다. 조 인현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작성된 판결문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행간에 드러나지 않은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 추적해볼 것이다. 1928년에 발생한 전북폭발탄사건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습격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 에서 발각되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제의 조선지배 첨병 역할을 했는데, 특히 전북 지역 이리지점 이 통의부 단원들의 표적이 된 이유에 대해 먼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계획 단계에서 총포와 화약 류를 소지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지만,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은 모진 고문과 회유 , 협박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재판은 2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언론보도와 판결문, 그리고 선생의 생전 증언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해보고, 아울러 이 사건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 글의 마지막에서는 자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선생의 인성과 품격을 엿볼 수 있는 여러 모습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선생은 1930년 10월 만기출소 후 남은 평생을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에서 불편 한 몸으로 은거했다. 일제의 집요한 감시로 인해 행동이 부자유스러웠지만, 다행히 뒤늦게나마 봉분 례 여사와 혼인을 하고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광복 이후에는 지역의 유지로서 여론을 주도하며 공익을 위해 헌신하였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지극한 효심으로 이름이 높 았고, 어릴 때부터 익힌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예술적 재능도 풍부한 팔방미인이었다. 이상, 본 사적은 송와 박영관 선생의 일대기를 주요 사건에 맞추어 일관되게 소개함과 동시에 , 향후 전문 연구과제를 제시하는 것에 그 1차적 의미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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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영관의 선대와 가계의 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