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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 형무소 복역의 전말과 동지 오석완·정기환 ∙ 73 관해장 앞 건물은 본래 17세기 말엽 장산도(長山島)라는 섬의 원님 사랑채로 쓰이던 한옥이었다고 한다. 장산도는 고려시대 나주목에 속해 장산현이라 불렸던 곳으로, 고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였는 데, ‘장산도 원님’이란 아마도 이런 옛 번영의 흔적이 반영된 말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세월이 한참 지나서 1964년 즈음 이 한옥 뒷편에는 ‘관해장(觀海莊)’이라는 여관이 들어섰다. 개화기 양옥건물로 지어진 관해장은 목포의 명물이어서 근대 역사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촬영된 곳인데, 과거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에서 묵고 갔다고 한다. 최근 앞쪽의 한옥과 더불어 ‘호 텔 목화’로 리모델링 되었는데, 이 명칭은 일제 강점기 목화를 수탈당한 목포의 역사를 되새기려 붙인 이름이다. 관해장 앞 한옥도 일제 때 여관으로 쓰였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박영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곳은 말 그대로 바다를 조망하는 ‘관해여관’이었다. 박영관은 1923년 3월 20일 이곳에서 조인현을 만나 대한통의부 단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다물 청년당 취지서’와 ‘격고 동포’ 유인물도 받았을 것이다. 이후 그는 목포를 중심으로 한 전남 지역에 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그의 생전 증언을 바탕으로 손자인 박동규 회장이 신 청한 공적조서에 의하면, 그는 1923년 5월 하순 경 전라남북도 지방에서 군자금 3만 원(圓)을 모금 하여 조인현 외 1명 편에 통의부를 통해 상해임시정부로 송금했고, 또한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총 7만5천 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서 등장하는 또 한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오석완(吳碩完, 1894~1933)이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오석완은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9인 중 한사람으로, 조인현이 1927 년 음력 5월 22일 그에게 전달한 권총과 탄환을 6일 뒤인 음력 5월 28일 박영관에게 전달했고, 박영관은 이 권총을 이듬해 6월 6일 체포되던 날까지 자신의 집에 은닉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었을까? 2) 박영관⋅오석완의 군자금모집과 목포형무소 복역 박영관은 3.1만세운동 당시 고창 무장면에서 장성 출신 송주일과 이미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따라 서 그는 송주일로부터 송흥진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을 알음알음 소개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목 포 지역에 인맥이 전혀 없던 조인현이 1927년 음력 2월 경 목포 신흥여관에서 오석완을 만나게 되 는 것도 박영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박영관과 오석완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포형무소 복역 사실이다. 박영관의 3.1만세운동이 전북폭발탄사건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점은 이미 앞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오석완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전력 또한 거 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이들의 목포형무소 수감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