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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1928년 무렵 만주에서는 3부가 정립된 가운데 재만 독립운동단체를 영도하기 위한 유일당 촉성 운동이 가열되었다. 이에 3부 외에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망라한 재만 18개 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 를 진행했다. 그러나 기성단체의 부정을 주장하는 ‘촉성회파’와 기성단체 본위를 주장하는 ‘협의회 파’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의 조직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김동삼은 촉성회파를 주도한 인물로 서, 전략적으로 정의부를 탈퇴하여 신민부 군정파 및 참의부 일부와 협력하였다. 하지만 결국 촉성 파는 소멸되고, 1929년 협의파를 중심으로 불완전하나마 3부가 통합되어 국민부를 결성한 것이다. 이처럼 1920년대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단체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단일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김동삼은 같은 안동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1958~1932)과 함께 대한통의부의 건설을 견인했고, 이후 분열된 통의부를 추스려 정의부를 설립한 주역이었다. 하지만 그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만주 지역에서 정의부는 불완전한 통합체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제한된 범위에서 지하조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통의부 조직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정의부 산하로 재편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인현을 중심으 로 한 전북폭발탄 사건의 주역들이 대한통의부의 이름으로 1928년까지 활약하다 체포된 것은 이런 복잡 다양한 1920년대 항일운동 세력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통의부원으로 활동한 조인현 세력들이 참의부와 결속된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모 집해 보낸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1924년 6월에 공식적으로 분화된 참의부 의 전후 사정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참의부는 임시정부 직속의 대한민국 군대를 자처했기 때문에 임정으로부터 승인된 날짜가 곧 창립일이 되었다. 이는 곧 참의부 의 성립이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상황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성립된 직후인 1923년 1월, 상해에서는 독립운동의 통일 적 지도기관과 운동노선을 세울 목적으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연히 이에 따라 기존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미래도 결정될 것이었다. 회의는 1월부터 6월까지 무려 74차례에 걸쳐 열렸는데,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이 참석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민족회의였 다. 하지만 임정 수립 때부터 내재된 갈등으로 인해 참석자들은 각각 공산주의 계열인 창조파, 안창 호⋅여운형과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독립군 계열의 개조파, 그리고 김구⋅이시영 등의 정부 옹호파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결국 회의는 결렬되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상해에서는 정부옹호파와 개조파 사이에 이승만의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제를 대신할 국무령제로의 임시헌법 개정 문제를 두고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당초 국민대 표회의 의장을 맡았던 김동삼 등의 남만주 통의부 지도자들도 개조파에 동조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승만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듯 상해 정국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1923년 1 2 월부터 통의부 소속의 의용군 중 일부 세력이 상해의 정부옹호파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다. 1923년 2월 통의부 공화주의자들과 내홍을 겪던 복벽파가 새로 의군부를 결성해 이탈하자 이들 의용군 세력은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결국 ‘임시정부 기치 아래 단결’이라는 명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