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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 69 휘하의 국내 조직원들을 통해 온갖 수단으로 모은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면, 그는 당연히 참의부 단원이어야 앞뒤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통의부의 하부조 직은 1924년 11월 정의부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정의부와는 별개의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증거 들로 국내와 만주 지역에서는 1930년대 초까지 통의부 단원의 항일 저항운동이 지속되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1924년 정의부 성립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통의부는 국내에 통의부 지부를 결성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다음의 조선일보 기 사를 보자. 홍경식의 실패에 대한통의부 분개 남만주에 근거를 둔 대한통의부에서는 얼마전에 세상의 막대한 주목을 끌어오던 경성 통의부지부 사건으로 검거된 홍경식(洪景植) 외 3인의 실패에 크게 분개하여 ...... 본부의 수령 김동삼(金東 三)의 명령으로 조선의 최근 사정을 정찰하는 동시에 모 중대한 사명을 주어 부원 몇 명을 조선 안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 사명을 띤 사람 중에 전세웅(田世雄)과 최○○ 외 한명은 벌써 지난 15일에 교묘히 국경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 양일간에 경성 시내에 잠입할 듯한데, 이에 대하여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다시 눈이 휘둥그래서 정거장과 그 외 여관 및 하숙집 방면에 엄 중히 경계를 한다고 한다. (조선일보, 1924. 12. 18) 위 기사는 1924년 12월의 조선일보에 실린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우선 경성에 대한통의부 지부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같은 해 11월 기사에는 홍경식을 비롯한 통의부 경성지부 조직원의 검거 사건이 대서특별로 보도되었다. 홍 경식(1889~1961)은 이미 신의주에서 1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가 다시 만주 통의부로 가서 지령을 받고 들어와 대한통의부 경성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때 다시 군자 금을 모집하고 관공서를 습격하려다 체포된 것이다. 국내 조인현의 통의부 조직이 홍경식의 통의부 경성지부와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여기서 우리는 조인현의 조직 또한 어느 시점에서 통의부의 지부 형태로 분화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다음으로, 위 기사에서는 대한통의부를 끝까지 지키며 이후 정의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자, 이후 또다시 만주지역 3부를 통합하고자 했던 김동삼(1878~1937)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홍 경식의 체포로 경성지부가 붕괴되자 통의부는 전세웅 등을 국내로 잠입시켰는데, 이때 과연 김동삼 이 이들에게 어떤 ’중대한 사명‘을 맡겼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통의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동삼의 이후 행적을 추적해보면 정의부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만주와 국내에서는 여전히 통의부원들의 항일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