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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역사를 다분히 시대적 이념도구로 활용했다. 따라서 다물이란 뜻도 ‘일 제로부터 잃어버린 국토와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신념의 상징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판결문에 적시된 ’다물청년당 취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민족은 인위적 병폐제도와 강자의 침략적 횡폭에 희생되어 그 멸망의 위험이 바로 눈앞에 임박 하였다. 이에 이를 만회할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인류애의 진제(眞諦)로 돌아오게 하는 대사명을 띠 고 본 청년당은 만들어졌다. 혈기 왕성하여 발산개세(拔山蓋世)하는 용감한 청년은 한 무리가 되어 본 당의 깃발 아래에서 모이자. 다물청년당은 주로 평안도 출신의 이주 한인들이 결성한 비밀결사단체의 하나였다. 이 단체는 계 급을 타파하고 약소 민족과의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민족 독립을 달성할 것을 내세우며 결성되었고, 1926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다물당‘으로 이름을 개칭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926년 2월 당시 중 국 화전현과 유하현 일대에는 다물당원 200여 명이 있었으며, 주로 정의부 관련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의부는, 앞서 설명했듯이 내분을 겪으며 약화된 통의부를 중심으로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1924년 11월에 연합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이름을 바꿀 때 강령도 바뀌었는데, 독립을 달성한 이후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 자계급의 독재는 부정하지만 만인이 평등한 민족 본위의 사회주의국가, 곧 사회주의적 민족주의국가 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다물당은 1929년 1월, 정의부 다수파가 주도한 민족유일당조직 동맹의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가맹을 선언하며 해체되었다. 평안도 신의주 출신의 조인현은 통의부 소속이자 바로 이 다물청년단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1924년에 통의부가 정의부로 바뀌고 1926년에 다물청년단이 다물당 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인현은 계속해서 대한통의부의 이름으로 애국지사들을 가입시키고, 다물청년단 명칭 그대로의 취지서를 그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조인현은 1924년 음력 4월에 강재 하와 함께 신의주로 잠입했다. 그런데 이후 평양에서 강재하와 헤어지며 군산에서 다시 재회를 기약 했다. 하지만 강재하는 군산으로 오지 않았고, 1924년 11월에 통의부는 정의부로 개편됐다. 그렇다 면 1924년 11월 이후의 조인현은 왜 계속해서 통의부의 이름을 내걸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남만주 지역 항일 무장단체들 간의 상호 대립과 이합집산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고찰과 이해가 필요하다. 3) 국내 통의부 조직의 여건과 활동에 대한 이해 앞서 보았듯이 복벽주의파와 공화주의파의 대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통의부 의용군의 일부 세 력은 1924년 6월에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참의부(參義府)를 결성해서 나갔다. 따라서 조인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