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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 67 대화정으로 옮기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작정한다. 조인현은 1927년 음력 2월 목포부 대정정 신흥여관에서 오석완을 포섭하고, 음력 5월 중순에는 오오득의 집에서 그를 통의부에 가입시켰다. 또한 이때 5월 중에 지인인 전기환을 김제노동조합사무실로 방문하여 역시 통의부 가입을 권유하지만, 그가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정을 말하고 권총 실탄 3발과 불온문서를 맡겨 두었다. 이어서 같은 해 음력 9월 30일 경 피고인 김종철을 통의부에 가입시 키고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협력할 것을 맹세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이상, 조인현의 행적에 대한 대체적인 정보는 그가 1930년 3월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최종 선고를 받았던 판결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인현이 박영관을 만나 통의부에 가입시킨 사실은 누락되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판결문이 오로지 고문과 강압을 통한 피의자의 자백과 진술에 의존한 것이라는 점, 그래서 결코 온 전한 자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의 행간에서 진실과 거짓의 옥석을 가려내는 것도 중요한 관건 이다. 예를 들어, 박영관은 그의 생전 구술에서 조인현을 목포 관해여관에서 만난 것이 1923년 3월 20일이라고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인현이 1924년 음력 4월에 강재하와 함께 신의주 로 들어왔다는 판결문 내용은 거짓 진술이 되는 셈이다. 또 조인현의 상관 강재하라는 통의부 인물 만 해도 그렇다. 강재하는 국내 어떤 자료를 통해서도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데, 이는 아마도 조인현이 실재 인물을 숨겨놓고 가명을 써서 진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인현의 판결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다물청년당 취지서’와 ‘격고(檄告) 동포’라는 유 인물이다. 우선 ‘격고(檄告) 동포’라는 유인물은, 동포들에게 알려 항일투쟁심을 격발시킨다는 뜻인 데, 이 내용도 아래와 같이 판결문에 그대로 적혀 있다. 이 격고동포 유인물에 대해서는 그 연원에 대해 자세히 알수 없지만, 아마도 만주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운동단체 단원들에게 배포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부조(父祖)의 피눈물이 대대로 전하는 산하(山河)는 오랑캐에게 유린된 지 10년으로 통한 (痛恨)을 참을 수 없다. 우리 대권(大權)을 강탈하여 우리 민족의 생명을 멸살(滅殺)하고, 동양의 평 화를 교란(攪亂)하여 세계의 화근을 양성시키는 것은 일본으로, 일본은 우리의 원수임과 동시에 세 계의 공적(公敵)이다. 이 원수를 토멸하려면 오직 철혈(鐵血)이 있을 뿐으로 우리 동포는 일어나 이 대업을 완성하는데 용감하게 매진해야 한다. 한편 ‘다물청년당 취지서’ 유인물에서 ‘다물(多勿)’은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의 고구려어이자, 고구 려의 건국이념이라고 한다. 즉 ‘다물’이란 ‘따물으다’ 혹은 ‘되물린다’는 뜻으로, ‘땅을 되물려 받는 다(찾는다)’로 해석된다. 따라서 단군의 고조선과 부여를 이은 고구려가 영광스러웠던 고조선의 땅을 다시 찾겠다는 뜻의 고구려 말을 한자음을 취해 ‘다물’로 적게 됐다는 해석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자들은 화려했던 조선의 상고사를 이용해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이를 항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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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영관 오석완의 군자금모집과 목포형무소 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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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영관 오석완의 군자금모집과 목포형무소 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