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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한편 1930년 3월의 최종판결문보다 앞선 1929년 12월의 예심종결서에는 그가 대정 6년(1917) 14세의 나이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독립단통의부에 가입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그는 1904년 생이 되는데, 고작 13~14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에 건너가 통의부 산하 군부(軍部)에서 8개월의 군 사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믿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한 기록이라 해도 나이에 관한 것만큼은 공식 기록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데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조인현의 앳된 사진 을 보면 예심종결서와 최종판결문의 기록이 전혀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는 없을 듯하다. <1930년 3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인현 사진> 어쨌든 계속해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군사훈련이 끝난 1918년 조선독립의 선전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동지 규합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 1년간 파견을 갔다. 파견에서 돌아온 1919년에 그는 일약 특무조장으로 승진된다. 그 후 그는 1924년 음력 2월 경 통의부 재무부 위원장 강재하(姜在夏)의 부하로 들어간 뒤, 통의부의 명으로 러시아 파견 때와 똑같은 임무를 부여받고 강 재하와 함께 조선 내로 잠입한다. 1924년 4월, 그는 강재하와 함께 ‘다물청년당취지서’와 ‘격고(檄 告) 동포’라는 유인물, 그리고 권총 2자루, 실탄 47발을 휴대하고 신의주로 잠입한다. 이어서 이 무 기들을 가지고 평양으로 간 뒤 강재하와 헤어지는데, 그들은 남쪽에서 기회를 보아 서로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벌여나갈 것을 기약한다. 강재하와 헤어진 조인현은 단신으로 전북 군산부(群山府)로 와서 친어머니인 염세초(廉世草)의 구 복동 집에 몸을 의탁한다. 이것 또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1928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가 가족을 동반하여 입국했다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가족은 어머니를 뜻한다고 보여 진다. 당초 그는 군산에서 강재하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기대했지만, 일제 경찰의 경계가 너무 심한 탓에 강재하가 상해로 되돌아가자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 일제에 의한 판결문 기록이라 모두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에 의하면 조인현은 한동안 자신의 임무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1926 년 음력 4월 경에 어머니 염세초가 사할린으로 건너가자 그해 음력 10월 경 거주지를 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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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형무소 복역의 전말과 동지 오석완 정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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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포 관해여관과 조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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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포 관해여관과 조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