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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 65 2) 의문의 인물 조인현 3.1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과 분열, 그리고 재통합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살펴본 이유는 바로 전북폭발탄사건의 핵심 인물인 조인현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조인현이야말로 박영관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인현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1930년 3월의 전북폭발탄사건 최종 판결문과 현재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 공적조 서 내용, 그리고 기타 독립운동 관련 정보제공처마다 달라서 도무지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힘들다. <조인현의 최종 재판판결문(1930.3.12.)에 기록된 나이> 우선 위에서 볼 수 있듯이, 1930년 최종판결문에 적시된 조인현의 나이는 당시 기준 26세이다. 그렇다면 그는 1905년생이 된다. 박영관의 생존 구술에 따르면, 그가 조인현을 목포에서 처음 만난 것이 1923년 3월인데, 그럼 당시 그는 고작 19세의 젊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판결문의 기록을 과연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그가 1891년생으로 되어 있다. 이 공적조서는 또 어떤 기록에 근거한 것인지 몰라도, 만약 이를 신뢰면 최종 재판이 있던 1930년에 그의 나이는 40세가 된다. 일제의 재판기록과 현재 대한민국 보훈처 공적조서의 간극이 14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 든 조인현의 행적으로 봤을 때, 적어도 그가 최종 재판을 받은 1930년 당시라면 최소한 30세 이상 은 되어야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능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