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page

6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⑤ 정의부 성립 이후에도 지속된 통의부 활동 이상, 지금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만주지역 통의부의 성립과 분열, 그리고 3부의 정립과 국민부로 의 통합을 시기적으로 소개하고 정리해보았다. 그런데 박영관이 소속된 국내 대한통의부 조직을 제 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의 정리가 어디까지나 1차적이고 도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념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한통의부가 1924년부터 분열이 극심해져 같은 해 11월 정의부가 조직 되자 이에 흡수되고 곧바로 해체된다는 도식으로는 1925년 이후 전개되는 국내 통의부 조직과 활동 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국내 언론보도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통의부의 해체시기에 대한 재검토를 반드시 해볼 필요가 있다. 통의부에서 갈라져나간 참의부는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잔존 통의부 세력들은 당연 히 임시정부에 대해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에 대한독립단과 학우회가 불참한 가운데 8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회의를 거쳐 통합단체인 정의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일제 측의 자료만 보더 라도, 정작 통합의 근간이 되는 통의부가 정의부 조직으로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가 있다. 게다가 1927년 11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통의부원이 정의부원과 협의하여 봉천 성 내의 부호로부터 1천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곧 1929년 국민부에 의한 3부 통합 직전까지 통의부가 정의부와는 별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편 1920년대의 국내 언론에서는 정의부 조직 이후에도 여전히 통의부원이 활동했던 기사들을 많이 보도하고 있다. 예컨대 1925년 5월 8일의 구태금광사무소습격사건, 5월 17일 박천면 송덕동 공자묘에서 일경과의 교전, 7월 충북⋅경북 일원에 통의부원 200명이 잠입해 활동한 사건과 평북 철산의 차련관주재소(車輦館駐在所) 습격사건, 1926년 3월 통의부원 경성잠입활동, 1927년 3월 경 성 종로서의 통의부원 체포, 4월의 통의부 군수품 이동, 9월과 12월의 군자금 모금활동 등, 직접적 으로 통의부가 언급된 기사가 매우 많다. 물론 여기에는 통의부 조직원 박영관 등의 전북폭발탄사건 도 포함된다. 이중에서도 특히 1927년 11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통의부원 고인섭(高仁燮)과 정의 부원 김정관(金正觀)과 협의하여 봉천성의 조선부호들로부터 군자금 1천여 원을 모집한 사실을 보도 하고 있는데, 이 기사는 정의부 성립 이후 만주지역에서도 통의부가 지속적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심지어 3군부가 국민부로 통합된 1929년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1932년 기사에서는 통의부원 김정범(金禎範)이 체포된 사건, 조선일보 1933년 기사에서는 통의부 소대장 김두천(金斗千)이 체포된 사건이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의부의 존속과 활동 년간을 1924년 11월 정의부의 성립 시기로 국한해 보는 견해 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 해체의 양상과 시기에 있어서 간부 위주의 상부조직과 그 아래 하부 조직을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해석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합당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통의부 의 상부조직은 정의부로 재편되었으나, 하부조직은 3부의 통합시까지 정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채 여전히 별개의 활동을 전개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