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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 1 1 머리말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출신의 송와 박영관 선생은 1919년 고창 무장의 3.1만세운동에 가담 후 일제 경찰을 피해 4년간이나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후 1923년, 중국 남만주 지역의 항일독립무 장단체인 대한통의부에 가입, 전라도에서 항일 독립운동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임 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7년 ‘전북폭발탄사건’, 즉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소속 10개 지점 중 하나인 이리지점을 습격하려던 사건으로 안타깝게도 이듬해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 어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출옥 후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인해 전남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에 은거하였다. 해방 이후 조국의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가 1975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에게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이 박영관 선생의 간단한 약력이다. 선생은 대한제국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 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3.1운동에서 시작해 일제의 한반도 수탈이 극에 달하던 때에 청장년을 보냈 으며, 광복 이후 좌우 대립과 남북 분열을 거쳐 4.19와 5.16, 유신시대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세월을 목도했다. 한마디로 선생은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체험자이자 투쟁가이며 목격자였 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당대 한반도 전역을 놀라게 한 전북폭발탄사건은 선생의 삶을 가장 강렬하고 선명하게 요약하는 핵심 단어이다. 일제의 폭압적 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기밀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원칙이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관련 자료가 대부분 미흡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박영관 선생의 경우, 전라도 민중 착취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이리동척지점 습격계획 관련 언론기사는 물론, 당시 전주지 법의 최종 판결문에 이르기까지 공인된 자료가 있어 그 행적이 뚜렷하다. 또한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 조직원으로서 군자금을 모집했던 정황도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국내 독립운동사에서 전북폭발탄사건의 상세한 배경과 관련인물, 파급효과 등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 이다. 박영관 선생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조명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인물’이건 그 가 살았던 시대의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인물이 특정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 을 맺고, 그 사건이 당시 사회와 국가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오는 촉매가 될 경우, 비로소 개별 인물과 사건은 의미 있는 ‘역사’로 확장된다. 박영관 선생의 생애는 당시 평범한 민중으로서 일제 식민통치를 자각하고 실천적 항일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며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 의 생애를 대변한다. 더 나아가, 이는 곧 일제 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 무장독립투쟁과 해방에 이르 기까지의 한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사적에서는 우선 박영관 선생이 태어난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역사적 배경과 선생의 선대 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