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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에, 중앙행정위원장으로는 이탁을 임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에 정의부 간부 이상룡이 선임되어 재만(在滿) 항일독 립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높이 평가하지 않던 재만 독 립운동단체들의 입각거부로 조각에 실패하자, 이듬해인 1926년 2월 이상룡은 국무령직을 사임하였 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가 대립하는 등 분란이 생기자, 1926년 1월 중 앙의회 상임위원장 이해룡은 비상수단으로 군인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정의부 군민대표회(軍民代 表會)를 조직하고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였다. 이 새 헌장의 특징은 근대적 헌법체제인 삼권분립제도 및 내각책임제와 지방자치제의 채택에 있었다. 군민대표회의 성립 이후 정의부는 점차 군인파 세력 이 증대되면서 무장항쟁이 중시되었다. 이에 1926년 10월, 정의부는 제3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민정으로 복구하고 헌장을 개정하였다. <중국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의 정의부 청사터> 이때부터 정의부는 독립운동단체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여 무력행동을 삼가고 식산흥업에 힘쓰 게 되었다. 이에 지방행정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화흥중학교⋅동명중학교 등을 설립하고, 일반교육 외에도 군사교육과 사상⋅문화계몽에도 힘을 쏟아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이밖에도 언론활동으로 기관지인 전우와 대동민보를 간행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정의부는 남만주 지역에 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인행정부(韓人行政府)로서 기반을 굳혀나갔다. 한편 북만주 지역에서는 1925년 3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독립운동단 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한 결과, 영안현(寜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라는 연 합 단체를 결성하였다. 신민부는 독립운동 및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청년들 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북만주지역 동포들이 가장 갈망하는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이를 위 한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50여 개의 소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기관지인 신민보(新民報)를 발간하고 필요에 따라 순회강연도 실시하였다. 또한 실업부를 설치하여 산업활동을 지원하고, 무력투쟁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