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age

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 61 고, 양기탁⋅현정경⋅김관성⋅황동호⋅고할신 등의 간부들이 체포, 구금당하였다. 이후 통의부 내 복벽주의 계열과 공화주의 계열의 대립은 더욱 악화되어 12월 하순에는 교전까지 있었고, 1923년 1월에는 홍경현 홍묘자(紅廟子) 방면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제5중대장 김명 봉과 부대장 조태현은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 중대에 의해 강 제로 압수되는 불상사도 발생하였다. 결국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 계열은 1923년 2월 대한통의부를 탈퇴하고, 따로 환인현 대황구 (大荒溝)에서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였다. 의군부는 무장활동에 중점을 두고, 또 기동성을 고려하 여 대한통의부에 비해서는 간소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대한제국기 순종 시대의 융희(隆熙 ) 연호를 사용했는데, 의병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풍부한 실전경험으로 일제 침략기관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국대륙 전반에 공화주의가 대세로 등장하였고, 러시아 혁명 으로 사회주의 기운이 확산됨에 따라 복벽주의 계열은 점차 위축,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대립 속에서도 통의부 의용군의 1, 2, 3, 5중대는 중립을 지키며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세력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자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 아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하여 1924년 6월,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무장항일단체로서 관전현(寬甸縣)을 본부로 하는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 이다. 참의부는 1929년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될 때까지 5년 동안 500명 이상의 병력을 계속 유지하면 서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의 중요한 기관을 파괴하였고, 일제의 군경과 밀정 및 부역자들을 살해하였 으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재만교민과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참의부의 관할 구역은 관전현⋅집안현⋅환인현⋅통화현 등 압록강 중류의 국경지대였는데, 이 때문에 국내진공작 전에서 가장 괄목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국경 방면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전투 가운데 3분의 2 이상은 참의부 독립군에 의한 것이라 할 만큼 두드러진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④ 남만주 독립운동의 중심, 정의부의 탄생 통군부에서 확장된 통의부의 내분으로 인해 결국 의군부, 참의부 세력이 연합 대오를 빠져나가자 통의부를 중심으로 다시 통합운동이 재개되었다. 그 결과 1924년 7월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 議會籌備會)가 소집되었는데, 통의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각 대표들이 요녕성 신빈현(당시 길림성 유하현)에서 모여 통합회의를 개최한 결과, 같은 해 11월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가 탄생하였다. 정의부는 창립 후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자치⋅군사⋅교육⋅재정⋅생계 등의 분과별 위원을 선임 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현정경⋅김이대⋅윤덕보⋅지청천⋅김동삼 등을 선출 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이어 신빈현에 본부를 두고 1925년 3월에는 중앙위원회를 조직함과 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