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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서, 관할 구역 내의 부민(府民)을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의무금을 걷어야만 재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③ 대한통의부의 분열과 참의부의 성립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가 식민지로 전락하자 국내의 항일 투사들은 그 터전을 잃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이후 애국지사들의 독립론을 결정하 는 중대 사안은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복벽주의(復辟主 意)는 군주정에 입각한 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주장이고, 공화주의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이념이다. 앞서 이미 1922년 2월에 설립된 최초의 독립군 연합단체인 대한통군 부를 언급한 바 있다. 이 통군부를 결성할 때의 주도세력은 복벽적 성향을 띤 채상덕⋅이웅해⋅전덕 원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에 통의부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는 점차 김동삼⋅오 동진⋅양기탁 등 공화적 성향의 인물들이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에 의용군의 실질 적 리더인 중대장 백광운⋅최석순⋅최지풍⋅김명봉 등은 대한제국기 의병 출신이라 대체로 보수적 복벽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자 양기탁(1871~1938)의 수형기록표> 이런 가운데 전덕원과 양기탁의 의견불화가 표면화되었다. 전덕원은 최익현 휘하의 소모장(召募 將) 출신으로 대한독립단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양기탁은 애국계몽운동의 주도 인물로 1920년 말 만주로 온 이후 남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통의부 결성 과정에서 복벽주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던 추세에, 두 사람의 개성 차이까지 더해져 양측의 반발이 표면 화되었다. 즉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 계열의 의용군 20여 명이 만주 관전현 지역에 있던 양기 탁 일행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가 현장에서 사살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