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 55 5 대한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고창군 무장면의 3.1 만세시위사건으로 체포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박영관은 고창, 정읍을 거쳐 장성갈재를 넘고, 다시 장성, 영광,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수백리 고난의 밤길을 걸었다. 이때 부터 수년간 그의 도피 행적은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목포에서 인생의 두번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단원이었던 조인현(趙仁賢, 1891~ ?)을 만난 것이다. 박영관은 이 만남으로 본인 역시 대한통의부 단원이 되어 전라남도 각지에서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집했고, 그것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폐 위조 혐의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대대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군자금 모집을 증대시키려 했고, 그 일환으로 일제의 대표 착취기 관인 동양척식주식회 이리지점을 비롯한 관공서, 은행 등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고, 그는 1928년 6월에 체포되어 1930년 10월 출소할 때까지 만 2년 4개월 동안 옥살 이를 해야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사항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남만주 지역 항일독립단체 인 대한통의부는 어떤 조직인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이 통의부의 단원 조인현의 정확한 이력과 국 내 잠입과정, 그리고 국내 통의부 조직원 확대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원칙과 행동의 의문점에 관 한 것이다. 1928년 6월, 세상을 놀라게 한 전북폭발탄사건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몇 가지 문제들을 해명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1) 남만주 지역 대한통의부의 성립과 변천 3.1만세운동 이후 도피 중이던 박영관은 1923년 3월, 대한통의부에서 국내 독립운동을 위해 비 밀리에 파견한 조인현을 목포에서 만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판결문 기록으로는 1924년 7월 이후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훨씬 더 신빙성 있는 박영관의 구술을 따르도록 하겠다. 선후의 시간 차이야 어쨌든, 그렇다면 박영관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한 대한통의부는 어 떤 조직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1920년 10월, 일제는 일본군의 만주 침략 구실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빙자하여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은 그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대량으로 무참히 학살하 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경신참변(庚申慘變 : 일명 간도참변)이다. 이 엄청난 만행으로 인해 만주 지 역의 한인 독립운동전선은 큰 타격을 받아 혼란스러웠다. 이에 남만주(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군 세력들은 1922년 2월, 최초의 연합 독립군단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 다. 그리고 이어서 같은 해 8월, 대한통군부에 미처 가입하지 않은 단체들을 통합하여 확대개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