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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53 이상 장성에서의 3.1 만세시위는 3월 3일부터 시작해서 4월 4일까지 모두 세 곳에서 여섯 차례의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때 참가인원은 약 1500여 명, 사망자 19명, 검거자 15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소룡리와 장성읍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시위를 주동했다면, 모현리의 경우는 전통적 유교 지식층이었다는 점에서 장성은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군민이 합심으로 일제에 대항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확고한 신념과 견고한 조직을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하여 그 양상이 매우 격렬하고 당당했다고 한다. 당시 일제 헌병은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복으로 변장하고 시위 군중 속으로 잠입하여 붉은 색을 표시해두었다가 체포하기도 했다. 장성의 애국지사들은 이렇게 색 출되어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장성의적비에 새겨진 24인의 3.1운동 애국지사들을 장성에서는 ‘별기열사(別記烈士)’라 하는데, 이 는 24인 열사의 강고한 의지와 불멸의 공적을 비석에 특별히(別) 기록해(記) 놓는다는 뜻이다. 장성의 3.1 애국지사들은 체포, 구금되어 전주⋅대구⋅서울 형무소에서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들은 형 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도 세금불납운동으로 일제에 맞서 의향(義鄕) 장성의 명예를 드높였다. 박영관 열사의 경우, 3월 15일 무장면 3.1만세시위 후 피신하는 과정에서 갈재를 넘어 장성으로 왔을 때 이들 장성의 별기열사들과 서로 연락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장성은 3월 21일부터 읍내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박영관이 장성으로 들어 왔을 때와 시기적으로 딱 들어맞는다. 무엇보다도 박영관 열사는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체포, 구금되 었던 시기를 전후해서 장성에 거주하였고, 이때 별기열사들과 함께 동지적 연대감을 형성하며 적극 적으로 세금불납동맹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1972년 의적비 건립 당시 장성군민들은, 비록 그가 고창 무장에 고향을 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성의 3.1 별기열사 24인 명단에 그를 포함 시킨 것이다. <장성의적비에 새겨진 박영관 선생 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