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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그렇다면 장성군 안에서의 3.1만세운동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곳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던 송주일 주도의 삼서면 소룡리 만세시위이고, 두 번째는 장성읍의 만세시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북이면 모현리의 만세시위이다. 송주일이 송흥진의 편지를 받고 소룡리교회에서 장성 지역 첫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건은 이미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장성읍과 모현리의 시위상황을 소개해보겠다. 장성읍에서는 본래 3월 15일에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으나 일제 헌병대의 삼엄한 경 계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장성읍 출신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정선유는 고향으로 돌아와 예배당을 세우고 사립 숭실학교(후에 삼일학교)도 설립했다. 이에 정선유는 3월 21일 기독교인과 숭실학교 학생 100여 명, 그리고 읍내의 청년과 군중 수백명을 이끌고 장성읍내를 휩쓸면서 만세시 위를 벌였다. 당연히 헌병대가 출동해 무력 진압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그날 저녁 9시에는 각 면의 동지들과 연락하여 봉화를 올리면서 끈덕지게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애국지사들을 3월 25일 밤, 산마루에서 올리는 봉화를 신호로 각 면에서 산 위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결의했다. 이로써 그날 밤 9시경부터 군내의 각 산 위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오르고 만세소리가 천지 를 진동했다. 험준한 산세와 지리를 이용한 이런 산발적인 만세시위에는 잔악한 일제 경찰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북이면 모현리의 3.1 만세시위는 장성에서 가장 격렬하게 타올랐다. 4월 3일은 모현리 사람들이 매년 즐겨오던 음력 3월 3일, 즉 삼짓날의 화전놀이가 있는 날이었다. 마을 유지들은 이를 가장하여 의논한 끝에 만세시위에 돌입했다. 당시 유상설, 고용석 등은 세계정세와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에 장성 사람들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어 한문선생인 정병모가 만세시위의 결행을 주장하자 모 인 사람들이 모두 동조했던 것이다. 이들 유지들이 앞장서고 모현리 마을 사람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자 그 수는 금새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사거리 헌병주재소의 헌병대가 몰려와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군중을 진압했지만, 다음날 오상구, 박 광우 등 200여 명은 태극기를 들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전날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이들 의 꺾이지 않는 투쟁은 장성의 모든 면마다 고을마다 퍼져나가 4월 내내 지속됐다. <우측부터 3.1운동기념사업비, 일반열사찬조비, 독립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