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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49 이처럼 송주일이 무장에 온 동기는 설명된다 하더라도, 박영관이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송주일이 광주로부터 전해진 최신 소식과 자신의 3월 10일 봉기에 대한 경험담을 무장의 애국지사들과 공유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무장의 가장 한복판인 읍성 안에 박영관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된 무장보통학교가 있고, 송주일의 방문지인 무장리교회가 있었다면, 두 사람 은 먼저 이 공간에서 첫 대면을 한 후 도곡리 박영관의 집에서 다시 구체적 실행방안을 모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송주일은 3월 15일 박영관이 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20여 명의 학생들과 독립선언서 등 유인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또한 학교 바로 옆 객사 너머에 교회가 있었 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어떠했건, 박영관은 김영완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중요 유인물도 얻었으 며, 송주일로부터 광주와 장성 만세운동의 경과도 들어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흥덕쪽 상황이 여의 치 않았다는 것을 은규선에게 전해들은 김영완으로부터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혈기의 박영 관은 심장이 뜨거워지고 조급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3.1운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국 내외 상황에 대해 비교적 충분한 정보와 인식을 바탕으로 철저히 준비한 끝에, 마침내 독립선언서 낭독의 연단에 결연히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④ 3.1운동 열사 장성의적비와 박영관 박영관은 비록 무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지만 1926년부터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체포되던 1928년까지 전남 장성군에 살았다. 또한 1930년 만기 출옥 후 1975년 운명할 때까지 45년을 장 성에서 보냈으니, 이곳이 또다른 고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에는 장성 인물 박영관의 이름도 별기열사 24인과 함께 항일투쟁의 흔적으로 뚜렷이 새겨 져 있다. 장성의적비는 장성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장성공원에 있다. 1977년에 조성된 장성 공원은 낮은 산봉우리를 공원으로 조성한 곳인데, 뒤로는 제봉산(啼鳳山, 325.5m)이 수호신처럼 우 뚝 솟아 있다. 제봉산은 동남쪽 병풍지맥(屛風支脈) 선상에 있는 봉형산(314m)에서 서북쪽을 향해 살짝 용트림을 하며 갈라져 나온 장성읍의 진산(鎭山)이다. 말 그대로 봉황(鳳)이 울어(啼) 장성이 안녕하다는 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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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창 지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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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창 지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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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내 통의부 조인현과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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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만주 지역 대한통의부의 성립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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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만주 지역 대한통의부의 성립과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