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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가까운 곳에 살았고 그 설립자인 광산김씨 집안과도 친분이 있던 도곡리 출신 박영관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학교 명칭이 ‘동명’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무장보통학교는 평생토록 그 전신인 ‘동명학교’로 남아있어야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청년 박영관은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자주적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식민지의 현실을 이런 방식 으로라도 고집스럽게 외면하며 자기 신념을 견지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필자의 이런 추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공식적, 객관적 서술이 필요한 안내책자와 설명에서는 이제부터 라도 당연히 ‘무장보통학교’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셋째, 송주일은 왜 무장으로 왔을까? 박영관이 동명보통학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더 이상 정확히 알 길이 없고, 송주 일과의 만남 또한 명확히 설명할 근거는 없다. 그런데 송주일의 무장 방문과 관련하여, 필자는 무장 읍성과 관련된 사적을 찾아보다가 뜻밖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기독교계 신문인 국민일보의 2014년 7월 26일자에는 고창 무장면의 ‘무장교회’를 다룬 기사가 나온다. 무장교회는 당시에는 ‘무장리교회’였다. 그 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문이자 학교 교문이었다.” 정말 그랬다.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교 회 교인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얘기했다. 그들이 어린 시절 다녔던 무장초등학교와 무장교회는 무장읍성 남문 진무루(鎭茂樓)를 통과해야 했다. 학교와 교회는 딱히 정문이 없었다. 성읍 주출입구 진무루가 두 곳의 문이었다. 진무루 누각에 오르면 객사를 기준으로 왼쪽엔 학교, 오른쪽엔 교회가 있었다. 무장교회 김석열(63) 장로와 김선영(62) 안수집사의 유소년과 청소년기, 또 청년기까지만 하 더라도 그들은 정면 3칸 팔작지붕의 이 문을 지났다. 그곳 출신 오필록(49·충북 옥천 행복한교회) 목사의 얘기다. “세상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등학교 정문이라고 말했어요. ....(중략)... 진무루 돌계단을 올라 왼쪽 흙길로 들어서 교회로 향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 무장예배당은 1995년 2월 26일 주일, 교인들이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한 것을 끝으로 기능을 다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성곽 동문 쪽 지금의 ‘무장 남북로 40번지’에 번듯한 벽돌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 예배를 올 렸다. 이 무장교회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3일 설립됐다. 1928년 발간된 ‘조선예수교장로 회 사기’ 하권에 따르면 선교사 도마리아와 전도인 이도숙 등이 점진(漸進)해 개척한 것으로 기록됐 다. 그리고 선교사 이아각과 조사 배순홍 김종인 등이 시무했다. 이것이 비산비야의 고을 무장의 복 음 전파 단초다. 이후 무장교회는 무장제일교회 아산남산교회 원천교회 무장중앙교회 등으로 분리 개척하며 폐군(1914년) 무장의 모교회가 됐다. 위 인용기사의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장읍성 남문 진무루는 무장보통학교, 즉 무장초등학교의 정문 역할을 함과 동시에, 무장교회의 정문 역할을 했다. 또한 진무루에서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