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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43 <동헌 앞 옛 무장초등학교(상)와 현재의 공터(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1919년의 시점에서 박영관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학교는 당연히 공 립 무장보통학교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박영관 관련 모든 안내책자와 설명글에는 여전히 동명보통학교 명칭이 등장하는 것일까. 또한 위 2016년 책자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무장 학교’는 ‘무창학교’와 ‘공립 무장보통학교’ 중 어느 것을 뜻하는 것일까. 박영관은 평생토록 독립운동의 행적에 대해 섣불리 기록으로 남기거나 말을 전하지 않았다. 일제 가 물러나고 광복이 된 이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독립운동이 정치적 향방에 따라 자칫 화를 불러왔던 좋지 않은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74년 무렵에는 아들 형제에게 본인의 일대기를 들려주었다. 현재 전하는 박영관의 3.1운동 과 전북폭발탄사건에 대한 행적은, 비록 자세하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대부분 그의 구술을 통해 전해 지는 것들이다. 그런데 박영관은 3.1운동 당시의 학교에 대해 언급할 때면 항상 동명과 무장 등 두 학교를 언급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정황들을 전제로 두고, 필자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론해보 면 다음과 같다. 1919년 당시의 무장 사람들은 비록 1914년에 무장이 폐군(廢郡)되어 고창으로 흡수되었지만, 5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본인들은 ‘무장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보여진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비록 동명보통학교가 무창학교에 흡수되어 무장보통학교로 바뀌었다 할지라도, 동명학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