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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장성에서 온 송주일이 ‘중앙에서 온 선교사 송주일’로 잘못 서술된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또한 국민휘보를 국민회보로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그런데 박영관은 김영완으로 부터 입수한 이 유인물들을 학교 등사판에 다수 복사했다고 했다. 위 책자에서 말하는 ‘학교’는 아마 도 그 다음에 언급되는 ‘동명보통학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동명보통학교와 무창학교는 사립 무장보통학교로 통합되었다가 1911년에 공립 무장보통학교가 되 었다. 이를 시간순서대로 보다 정확하게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학교 명칭 설립인가 설립자 위치 비고 사립 동명보통학교 1909.08.23 김배현(金配鉉) 무장군 동면 내동 광산김씨 사립 무창학교 1909.08 말 김상일(金商一) 무장군 상리면 하라리 청도김씨 후손 교육 사립 무장보통학교 1910.12.01 김영곤(金永坤) 무장군 이동면 성내리 (현 무장읍성 내) 무창⋅동명 통합 공립 무장보통학교 1911.09.15 상동 1925년, 6년제 인가 공립 무장심상소학교 1938.04.01 상동 무장국민학교 1941.04.01 상동 무장초등학교 1996.03.01 상동 2004년 신축, 이전 동명보통학교는 당시 무장군 이동면 이동리에 사는 광산김씨 김배현이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동면 내동’이다. 이곳이 현재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무장면 행정복지 센터 동쪽 인근으로 추정된다. 무장 3.1운동의 주모자인 김영완 역시 광산김씨인데, 이들 광산김씨 는 조선시대 무장현의 대표적 향리집안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면 서 상당한 지주계층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이런 경제적 여유가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 또한 무창학교는 본래 청도김씨 김상일이 문중의 후손들을 교육시키려는 취지에서 설립한 것으로 , 그 위치는 청도김씨 집성촌이자 그 선조들을 배향한 계산서원(溪山書院) 인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오늘날 상하면 검산리에 해당된다. 이 두 학교는 1910년 12월에 통합되어 무장읍성 내의 객사 왼 쪽, 동헌 영역 앞 공간에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고 나서 곧바로 읍성철거령을 내리는데, 호남지 역 읍성의 대부분은 이때 철거되었다. 다행히 고창읍의 모양성(牟陽城)은 원형이 보존되었지만, 무장 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곽이 헐리고 부속 건물도 허물어졌다. 그나마 무장 객사(客舍)와 동헌 (東軒), 그리고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훼손되지 않았는데, 고을 수령의 업무 공간인 동헌 영역 앞 관청들이 헐린 빈터에 통합된 사립 무장보통학교가 들어선 것이었다. 이후로 학교 명칭은 변화가 있었지만, 2004년 무장읍성 복원으로 무장초등학교가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은 초등교육의 산실로 93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켰다. 참고로 동헌 건물은 무장초등학교의 관사로 쓰이다가 최근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