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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라서 3.1운동에 더 빨리 참여했고 규모도 컸던 광주 선교기지가 목포 선교기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독립가는 광주 박경주의 집에서 등사된 500매의 독립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목포에서 발견된 조선독립가 원본> 이상, 박영관 열사가 3.1운동 당시 학교에서 등사한 세 가지 유인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았 다. 그동안 3.1절만 되면 상투적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만 주로 부각되고, 국민회보나 독립가, 그 리고 우리 동포들에게 알리는 격문인 ‘경고아이천만동포’ 등은 거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데 예나 지금이나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다수의 군중들을 모으고 격분시키기 위해서는 구호와 노래, 그리고 격문이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이나 젊은이들의 경우,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3.1운동이 어떻게 그토록 단기간에 전국으로 퍼져 몇 달 동안 지속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학교와 읍내 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국민회보 배포하며 군중과 함께 독립가를 외쳐 불렀던 젊은 애국지사 박영관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가슴이 뜨거워질 것 이다. 둘째, 동명보통학교인가 무장보통학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