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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국민회보와 조선독립신문 등사본(영천신문, 2019. 6. 7)> 위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국민회보의 내용은 ‘아태행태상황제폐하(我太行太上 皇帝陛下) 붕어(崩御)에 원인(原因)’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에 의한 고종의 독살설을 제기하고, 귀족대 표 이완용 등 6인을 지목해 ‘가칭선일동화(假稱鮮日同和)함을 증명(證明)한 역적(逆賊)들’이라고 썼 다. 이 기사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동안 기록으로만 있었다고 전해지던 신문인 국민회보의 1919년 3월 1일자의 등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왼쪽 조선독립신문 등사본에는 민족대표 33인 등이 태화관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종로경찰서에 구인됐다는 내용과, 2000만 민족이 마지막 1인까지 남게 되더라도 절대 난폭하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비폭력 운동 방침 이 실려 있다. 이종일⋅이종린 등의 주도로 창간된 조선독립신문은 서울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 서 독립선언서와 함께 인쇄되어 3월 1일에 반포된 것으로, 창간호는 활판 인쇄로 발행됐으나 이튿날 인쇄된 제2호부터는 등사판으로 발행됐다. 한편 독립가(獨立歌)는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서 ‘독립만세’의 구호와 함께 불려졌던 노래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노래가사의 배포가 주로 전라도 지역의 3.1운동 시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이다. 이를테면 3월 10일의 광주 만세운동에서는 박경주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警告文) 1,500매, 그리고 독립가 500여 매를 등사하여 목포 등 인근 지역에 배포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3.1운동 봉기에서는 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 또한 더 깊이 연구해볼 대상이기도 하다. 독립가의 곡조가 전해지는지는 미처 확인을 못해보았지만, 독립가의 가사는 전해 지고 있다. 이 가사는 등사되고 필사되는 과정에서 아마도 내용이 유사한 여러 판본이 있었던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