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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35 기포 이래 처음으로, 거리는 온통 우렁찬 ‘독립만세’ 함성과 ‘독립가’ 선율이 울려 퍼지며 고요한 무장 고을을 요동치게 했다. 이윽고 얼마 안 있어 급히 출동한 일제 경찰은 격해진 군중들을 몽둥이로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 다. 특히 선두 대열의 주모자들에게는 사나운 표범처럼 총칼을 들이대며 가차 없이 체포해 차꼬를 채웠다. 그런데 당시에는 지역마다 소수의 기마헌병 부대도 있었다. 말을 타고 위에서 내리치는 채 찍은 생각만 해도 위압적이다. 잠깐 사이에 무장 천지는 온통 비명과 아우성으로 들끓었다. <일제 강점기 기마헌병과 독을 지고 가는 조선인> 이때 찰라의 순간, 건장한 기마헌병 하나가 짐승에게 올가미를 투척하듯 박영관에게 포승줄을 던 졌다. 그런데 이 포승줄이 목에 걸리자, 목표물을 잡았다고 생각한 헌병은 말에서 내려섬과 동시에 줄을 옥죄어 잡아당기며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스물 한 살이던 박영관은 한창 체력과 완력이 왕성 하고 날렵할 때였다. 일단 포승줄이 목을 더 이상 조이지 않게 두 손에 힘을 주고 단단히 움켜쥔 채 헌병이 더 가까이 접근하길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다가오자 박영관은 순식간에 주먹을 날려 상대의 눈을 가격함과 동시에, 포승줄을 벗겨젖히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최소한 1년 이상의 잔혹한 고문과 옥살이를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박영관은 이후 북동쪽을 향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정읍 방향으로 도주했다. 그런 다음 오늘날 정읍 입암면 즈음에서 다시 장성 갈재(노령)를 넘어 북이면으로 내려갔다. 갈재는 정읍과 장성을 이어 주는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의 고갯길이다. 300미터도 채 안 되는 높이지만, 예부터 한양에서 충청도 와 여산, 전주, 정읍을 거쳐 전라남도 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갈재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넘은 고개이고,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길에 지나간 고개이 며, 동학농민군이 장성의 황룡강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파죽지세로 전주를 향해 올라간 고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