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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하자 비분강개함을 금치 못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 치욕에서 벗어나는데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 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적극 호응하였다. 3월 15일 무장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4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순 간의 기지와 완력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5년의 세월동안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을 방랑하며 와 신상담 재기의 기회만을 노렸다. 이상 공적비에 새겨진 박영관의 출생과 가계, 그리고 3.1운동의 행적은 매우 간략하다. 어려서부 터 효성이 지극하여 타고난 효자라는 명성을 들었다는 사실은 후손의 증언으로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가 말년에 일찍 돌아가신 부모를 다시 모시기 위해 천하의 명당을 10년이나 찾아 헤멘 것은 나중에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밖에도 그는 어려서 매우 영특하고 남다른 기풍이 있었다고 하는 데, 적당히 예시가 될만한 사례가 없어 아쉽다. 또한 3.1운동 관련해서는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4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과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순간의 기지와 완력으로 도주하였다’는 두 가지 사실만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동안 박영관의 전 반적인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행적은 대체로 전북폭발탄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3.1운동에 대해서는 너무 소략하고, 전해지는 내용 또한 많지가 않다. 따라서 보다 많은 구체적 내용 을 보태기는 힘들지만, 그동안 발간된 안내책자와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정황을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장성 삼서면 소룡리교회 부속 소학교 교사로 있던 송주일이 박영관을 찾아온 것은 적어도 봉기일인 3월 15일 이전이었다. 3월 10일 장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온 24세의 송주일과 무장 도곡리 출신 21세 청년 박영관은 서로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사실은 없다. 송주일의 고향은 전남 고흥이고, 따라서 당시 거주지였던 장성조 차도 익숙치 않았으리라 가정해본다면, 그보다 더 먼 고창 지역의 특정 인물과 연관된 흔적을 찾기 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유학자의 가풍에서 자란 박영관이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상상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는 아마도 제3의 인물을 통한 연결고리가 있지 않았 을까 추정해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합리적인 추론을 시도해보겠다. 박영관은 송주일과 사전에 도곡리 자택에서 만나 거사 계획을 치밀하게 논의했다. 여기에는 장성 에서 이미 만세시위를 한 송주일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영관은 같은 고을 김영완으 로 이미 독립선언서⋅국민휘보⋅조선독립가 등의 유인물을 입수하여 학교 등사판으로 인쇄를 완료 한 상태였다. 태극기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드디어 고창 지역 최초의 3.1운동 거사일이 밝았다. 오전 10시에는 무장 장터에서 김영완이 이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수백 명의 군중은 거리를 나서며 행진을 시작했다. 박영관은 오전 11시 무장보통학교에서 학생과 민간인 약 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역시 학교 밖 무장읍성을 나섰다. 이때는 송주일도 동참하여 2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나누어주었다. 갑오년 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