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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33 <옛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교회 : 현재는 성광교회> 한편 박영관 관련 기록에는 대부분 송주일이 ‘선교사’로 소개되어 있는데, 장성군의 기록에 의하 면 그는 당시 소룡리교회 경영 소학교의 교사였던 것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선교사(宣敎師)’란 ‘해 외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신부나 목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24세의 젊은 송주일에게 ‘선교사’란 엉뚱한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송주일의 행적을 보면, 그는 장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3월 10`일과 17일 사이에 고창 무장면의 박영관을 만나보고 다시 돌아왔다. 왜냐하면 무장면 봉기는 3월 15일이었기 때문이다. ③ 박영관의 3.1 운동 거사와 몇 가지 의문점 앞서 김영완의 주도로 3월 1일 오전 10시 무장 장터에서 시작된 무장면 3.1만세운동의 첫 번째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두 번째 장면에 해당되는 박영관의 오전 11시 3.1운동 거사를 알아보 자. 박영관이 태어나고 자란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의 시목동마을회관 경로당 앞에는 지난 2018년 10월에 건립된 ‘애국지사 송와 박영관 공적비’가 있다. 이 공적비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된 대 한민국임시정부 건국기원 100년 되던 해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국 각처 300여 명의 독지 가 성금과 도곡리 주민들의 부지 쾌척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비문에 실 린 박영관의 생애 전반부를 그대로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의 휘는 영관(永寬) 호는 송와(松窩)이다. 성은 박(朴)으로 관향(貫鄕)은 밀양이다. 규정공(糾正 公) 현(玹)의 26대손이다. 1899년 7월 7일(음)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84번지에서 경삼 (敬三) 공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 출천지효(出天之孝)의 명성을 얻었고 빼어난 자질과 영매한 기풍으로 향리에 이름이 났다. 나라의 운이 비색(否塞)하여 일제의 침탈을 당